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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바둑판 바깥 세상 기웃…천재 기사의 ‘외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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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SNS 활동에 열심인 커제가 항저우 아시안게임 선수촌 음식을 올린 영상. [커제 SNS 캡처]

SNS 활동에 열심인 커제가 항저우 아시안게임 선수촌 음식을 올린 영상. [커제 SNS 캡처]

커제 9단이 절치부심 끝에 중국 랭킹 1위로 복귀했다. 1~5위는 커제, 양딩신, 리쉬안하오, 딩하오, 구쯔하오 순인데 차이가 미미해서 언제 뒤집힐지 모른다. 한때 4위까지 내려갔던 커제는 신진서 9단에게 고비마다 패배하며 ‘외도’에 대한 비난도 자주 받아왔다.

커제는 19세 때인 2016년 세계 대회 3관왕에 오르며 중국 1위가 됐다. 그는 세계 바둑을 연속 평정하며 적수가 없는 최강자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런 커제가 언제부터인가 바둑판 밖의 일에 관심이 커졌다. 대학에 들어갔고, TV 예능에 고정 출연하기도 했다. 특유의 독설이 화제를 부르기도 했다.

바둑을 평정한 커제가 호기심을 떨치지 못하고 외도에 나서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사는 그리 만만하지 않다. 어느 순간 정체되기 시작한 커제가 슬슬 패배가 잦아지면서 ‘드디어 내리막인가’ 하는 의심에 휩싸였고 사람들은 ‘외도가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커제가 외도를 끊고 목소리도 낮추더니 중국 1위로 복귀했다. 앞으로 신진서와 한 번 더 결전을 벌이고 싶다는 간절한 의지가 느껴진다.

프로기사는 오직 바둑에 전념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야 정상이 유지되는 것일까. 인간적 호기심은 무의미한 것일까. 이세돌 9단은 전성기에 사업도 벌이고, 동료 기사와 술 시합도 벌였다. 어린 이세돌을 가르쳤던 권갑룡 9단은 “양주병이 가끔 사라졌는데 세돌이가 분명했지만, 모르는 척했다. 세돌이는 억압하면 안 된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억압해도 좋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만 특히 이세돌은 안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지난 7일 LG 트윈스 유니폼을 입고 시구하는 신진서. [사진 LG 트윈스]

지난 7일 LG 트윈스 유니폼을 입고 시구하는 신진서. [사진 LG 트윈스]

이세돌은 위험을 즐긴다.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스스로 벼랑 끝에 선다. 자학적인 느낌마저 주는 이런 감각적이고 예상을 뒤엎는 용병술은 그가 누렸던 자유의 소산인지도 모른다.

이창호 9단은 노력하는 천재다. 독서를 통해 바깥세상을 볼 뿐 외도는 없다. 그의 바둑에선 외로움이 묻어난다. 한 명리학자는 이창호의 사주를 놓고 “불(火). 그중에서도 정오의 태양이다. 물(水)이 귀하다. 놀이가 없다”고 했다. 이창호의 속 깊이 갈무리된 뜨거움, 일탈이 없는 외길 인생의 운명을 느끼게 하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창호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다. 1993년 러시아 볼가강 유람선에서 조훈현 9단 대 이창호 9단의 국수전 도전기가 열렸다. 이창호는 대국만 끝내고 혼자서 곧장 돌아왔다. 다음날 수능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좋아하는 선배 유창혁 9단이 만류하여 시험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이창호는 대학에 관심이 있었다. 이름만 걸어놓는 것이 아니고 진짜 실력으로 다녀보고 싶었던 것이다.

신진서 9단의 언행은 24세 나이에 비해 훨씬 어른 같은 느낌을 준다. 그는 역대 어느 일인자보다 바둑을 알리는 일에 열심이다. 그걸 일인자의 사명으로 느끼고 있다. 그의 바깥세상에 대한 관심은 아직 미미하다. 바둑에 깊이 몰입해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신진서는 프로야구 경기에서 LG 유니폼을 입고 시구를 했다. 보기 좋은 그림이었다. 누구도 이걸 외도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인자라 해도 뭔가를 적당히 하는 게 맞다. 문제는 선택인데 바둑기사는 매니저가 없기에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더구나 바둑은 혼자 하는 마인드 게임이라서 일인자의 자리에 오래 있다 보면 긴장이 풀린다. 커제는 총 92개월 동안 중국 1위였다. 자유분방한 커제가 외도를 생각할 만큼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신진서는 현재 52개월째 한국 1위다. 긴 시간이지만 신진서는 한국 바둑을 짊어지고 중국의 수많은 강자를 혼자 커버하는 형국이라 긴장을 풀 수 없다.

그렇다면 돌아온 커제는 신진서에게 어느 정도 위협일까. 커제가 비록 지는 해라 해도 아직 나이가 27세에 불과하다. 명예회복을 위해 절치부심해온 커제는 혼신의 힘을 다할 것이다. 커제 역시 굉장한 천재이기에 결코 쉬운 승부는 아닐 것 같다.

박치문 바둑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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