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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걸린 며느리 수혈하자…"몰상식한 X" 시엄마 분노한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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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주먹보다 말이 더 아플 때가 있다. 건강할 때는 그나마 낫지만, 몸과 마음이 아픈 환자들에게 서늘한 말은 비수가 되어 꽂힌다. 중앙일보의 프리미엄 구독 서비스 'The JoongAng Plus(더중앙플러스)'에 연재된 '김은혜의 살아내다'는 말 한 마디로 죽고 사는 인생사를 들려준다. 김은혜는 암 환자를 돌보는 한의사다. 수백 명의 암 환자 옆을 지키며 나누었던 이야기 속에서 그는 약도 되고 병도 되는 말의 힘을 발견한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 쏟아진 폭언  

살고싶다는 의지로 충만했던 여자 환자가 있었다. 그녀는 가운을 꽉 쥐어 잡으며 말했다.

“저, 어떤 상황에서도 진짜, 살고 싶어요.”

항암 치료를 몇 달간 쉬지 않고 받아 왔던 그 환자에게 중증의 빈혈이 생겼다. 수혈을 받아야 한다는 말에 그녀의 손은 덜덜 떨렸다.

그러다 문득 걸려온 모르는 번호.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이 들려왔다.

“당신이 뭔데 내 아들 핏줄 낳을 애한테 그런 더러운 걸 집어넣어! 남의 피 받으면 부정타는 거 몰라? 너, 하늘에서 천벌 내릴 거야! 이 몰상식한 X아! 너 같은 돌팔이한테는 다시는 안 가!”

폭언을 퍼부은 건 환자의 시어머니였다.
환자는 민망해하며 시어머니 대신 사과의 말을 긴 문자 메시지로 남기고 다른 병원으로 떠났다. 그리고 몇 달 뒤.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들 핏줄에 더러운 피 넣어?” 시어머니 욕설, 며느리의 죽음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21253 

아이 잃은 상처 헤집은 말과 말 

문자 그대로 숨이 꼴딱 넘어갈 것같은 심각한 과호흡 증상에 시달리던 환자가 있었다. 그녀는 십수 년 전 아들을 잃었다. 자식을 잃은 건 큰 아픔이었지만, 가슴에 잘 묻어뒀다고 생각하며 일상을 살아갔다. 그러다 입원할 정도로 심각한 여러 증상이 갑자기 나타나게 된 건 딱 두 문장 때문이었다.

하나는 점을 보러 갔다가 들은 “자식을 잡아먹을 사주”라는 말.

또 하나는 부부싸움 도중 남편의 입에서 튀어나온 서늘한 말.

"당신이 그때 아이에게 그러지만 않았어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영원히 매달려 살 수는 없다. 애도 기간을 거쳐 조금씩 아픔을 잊어가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잊었는가 싶을 때 차가운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히며 상처를 헤집는다.

▶점쟁이 “자식 잡아먹을 사주”…숨 넘어간 엄마 숨 돌린 곳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22876

"죽지도, 죽이지도 못하는" 우리딸 

오랜 간병 앞엔 효자가 없다. 그것이 자식이어도 마찬가지다.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딸을 4년째 돌보고 있는 엄마가 있었다. 그 모녀가 있는 병실에 40대 초반의 유방암 환자가 입원했다. 그런데 어느날, 유방암 환자가 병실을 뛰쳐나갔다. 딸을 간병하던 엄마가 던진 쓴 소리에 상처를 받은 거였다.

"차라리 죽는 날 알고 아픈 게 더 낫지 않아요? 젊은 사람이 시간을 받았으면 잘 쓸 생각만 하면 되지 하루가 멀다 하고 우는소리만 해요? 죽지도, 죽이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심정은 안중에도 없어요?"

그러나 그 엄마만 탓하기도 어려웠다. 누구라도 그녀와 같은 상황이면 그럴 수 있지 않았을까.

▶“당신은 죽는 날이라도 알지” 식물인간 딸 돌보는 엄마 폭언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9694 

병실을 환하게 만든 한 사람의 힘 

아픈 이들이 모인 병원에선 절망의 그림자가 더 짙다. 그러다 보니 환자끼리도 날카로운 말로 상처를 주고 받을 때가 있다. 어느 날 난소암 환자가 안면 마비 환자에게 "당신은 죽을 병도 아니잖아"라고 했다가 말싸움이 커졌다. 이후, 침묵으로 어두워진 병실을 환하게 밝힌 건 딱 한 사람의 힘이었다. 연세가 많은 신입 유방암 환자였다. 그녀는 날카로운 말을 내뱉던 난소암 환자를 끌어안고 도닥였다.

"사람한테서 받은 상처는 사람한테서 치료받아야 돼. 근데 그러려면 우리도 치료까지는 못 해주더라도 상처는 주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대화를 해야 치료도 받고 깊은 이야기도 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해."

▶“당신은 죽을병도 아니잖아” 그녀 바꾼 심야 병실의 마법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9581

아픈 환자가 도리어 의료진을 위로할 때

하루하루 증세가 심각해지던 70대 후반의 암환자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피를 쏟아내며 주저앉았다. 의료진들은 중환자실로 옮기기 위해 정신없이 처치를 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간병인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평소에는 피 나온 적 없는데…. 내가 놓친 것 같나요?"

침대를 옮기려는 순간, 환자가 외쳤다.

"이 선생! 나 봐요! 자네 잘못 없어! 그러니 잘 살다가 또 봐요. 둘 다 잘 살아야 또 볼 일이 있는 거야!”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환자와 간병인은 결국 다시 만났다.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도 결국 말이다. 배려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다정하고 따뜻한 말. 평생 아픈 사람만 보는 게 의료진의 일이다. 그 속에서도 세상이 따뜻하다고 느끼는 순간, 계속해서 이 일을 해나갈 힘을 얻는다.

▶피토한 70대 “이봐, 나 봐요!” 울던 간병인 놀라게 한 한마디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6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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