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막장 희곡 '욘'… "모두가 고독한 지금 우리의 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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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극단 올해 시즌 첫 연극 '욘'을 연출하는 고선웅 예술감독과 드라마트루기 김미혜 교수가 지난 6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포즈를 취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시극단 올해 시즌 첫 연극 '욘'을 연출하는 고선웅 예술감독과 드라마트루기 김미혜 교수가 지난 6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포즈를 취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난 권력이 있었어! 나도 거역할 수 없는 야심!”
젊을 적의 백만장자 꿈을 포기 못한 퇴역자 욘(이남희)의 허망한 외침에, 늘그막의 옛 애인 엘라(정아미)가 열렬히 호응한다.
지난 6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진행된 서울시극단 연극 ‘욘’의 연습실 현장. 고선웅(56‧서울시극단 예술감독) 연출이 “‘아멘, 할렐루야’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여 달라”고 배우에게 주문하자, 드라마트루기(극작 방향 설계)를 맡은 김미혜(76)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명예교수의 메모하는 손길이 덩달아 바빠졌다.
‘현대극의 아버지’ 헨리크 입센(1828~1906)이 만년의 고독을 토해낸 희곡 『욘 가브리엘 부르크만』(이하 '욘')이 고선웅 각색‧연출로 29일부터 다음 달 21일까지 세종M씨어터 무대에 오른다.

29일 세종문화회관 개막 연극 ‘욘‘ #노르웨이 왕실 훈장 김미혜 번역 #‘조씨고아’ 매진신화 고선웅 연출 #“원작 단숨에 읽고 눈물 뚝뚝… #인생은 몰락, 집착 무의미함 느꼈죠”

노르웨이 왕실도 인정한 '입센' 한국어 번역판 첫 연극

연극 '욘' 포스터 사진 서울시극단

연극 '욘' 포스터 사진 서울시극단

김 교수가 노르웨이 원작을 한국어로 번역한 입센 전집(총 23작품, 10권)을 토대로 한 첫 연극이다. 그간 국내에서 입센은 영어·프랑스어 등 외국어 중역본 위주로 소개됐다. 서울시극단이 2017년 초연한 입센 연극 ‘왕위주장자들’, 1997년 극단 비파‧극단 사조가 '욘'의 제목을 바꿔 공연한 ‘잃어버린 시간 속의 여인들’도 영어 중역 대본이었다. 그런 입센의 작품을 원어 의미에 가깝게 만날 수 있게 됐다.
지난해 입센 전집 번역으로 노르웨이 왕실 공로 훈장을 받은 김 교수를, 고 연출과 함께 만났다. 김 교수는 “입센은 언어마다 번역 스타일이 크게 다르다”면서 “외국어 중역본이 아닌 대본으로 무대에 올린다는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입센 희곡, 막장 코드 많아…2024년 우리 얘기"

14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연극 '욘' 연습실 공개가 진행됐다. 사진은 엘라 역 배우 정아미와 욘 역의 이남희(왼쪽부터)가 연습 중인 모습이다. 서울시극단

14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연극 '욘' 연습실 공개가 진행됐다. 사진은 엘라 역 배우 정아미와 욘 역의 이남희(왼쪽부터)가 연습 중인 모습이다. 서울시극단

왜 지금 ‘욘’을 택했을까. 고 연출은 "'욘'을 단숨에 읽고 감동이 몰려와 울었다. 내 대표작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도 그랬다"면서 “19세기 노르웨이 희곡인데 지금 우리 사회 배경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우리 사는 얘기’”라고 말했다. ‘귀토’ ‘회란기’ ‘칼로막베스’ 등 고전을 연극‧뮤지컬로 옮겨온 그가 처음 무대에 올리는 입센을 어떻게 해석할지 공연 팬의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연극 '욘' 주연 배우 콘셉트 사진. 왼쪽부터 배우 정아미(엘라 역), 이남희(욘 역), 이주영(귀닐 역)이 극중 의상을 입고 있다. 사진 서울시극단

연극 '욘' 주연 배우 콘셉트 사진. 왼쪽부터 배우 정아미(엘라 역), 이남희(욘 역), 이주영(귀닐 역)이 극중 의상을 입고 있다. 사진 서울시극단

"재미란 캐릭터 간 충돌에서 나온다"는 그는 “‘욘’은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와 옛 사랑, 이런 관계가 적나라하고 피부에 와 닿는다. 한국의 어느 집 명절이나 휴일 풍경 같다”고 했다. 김 교수도 “입센 희곡에 한국식 막장 코드가 진짜 많다”면서 “이름을 철수, 영희 엄마로 바꿔도 상관없을 정도다. 인간은 왜 사는가 질문하는 실존주의극의 시초”라고 설명했다.

아내의 쌍둥이 언니가 옛 애인…어느 금융가의 몰락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은행가로 성공했던 욘은 은행 파산으로 한순간 몰락한다. 8년 간 수감 생활 후 또 다시 8년을 2층 다락방에서 '병든 늑대'처럼 칩거한다. 제 딴엔 재기를 노리는 것이지만, 남들 눈엔 허장성세다. 그런 남편이 수치스러운 아내 귀릴은 대학생 아들 엘하르트(이승우)에게 희망을 걸지만, 엘하르트는 연상의 이혼녀와 떠나려 한다.
욘 가족의 집은 귀릴의 쌍둥이 언니 엘라의 소유다. 엘라는 젊을 적 욘에게 실연당한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채 조카 엘하르트에게 집착한다. 콩가루 집안의 20년치 갈등이 어느 겨울 하룻밤 사이에 터져 나온다.
고 연출은 ‘눈보라 치는 고독 속에서’란 부제를 달았다. 고립이 만연한 우리 사회에 대한 은유일까. 그는 “8년 간 또 다른 승리를 준비 중인 욘을 고독하지만 역동적인 인물로 그렸다”고 말했다.

이번 연극은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의 작품에서 무대 디자인 영감을 얻었다. 사진은 생전 입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걸로 알려진 뭉크가 입센의 '욘' 원작 희곡에 영감받아 그린 자화상 '밤의 방랑자'(1923-1924)다. 사진 ⓒMunchmuseet, 서울시극단

이번 연극은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의 작품에서 무대 디자인 영감을 얻었다. 사진은 생전 입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걸로 알려진 뭉크가 입센의 '욘' 원작 희곡에 영감받아 그린 자화상 '밤의 방랑자'(1923-1924)다. 사진 ⓒMunchmuseet, 서울시극단

『인형의 집』,『민중의 적』등에서 입센이 주창해온 개인 해방론은 ‘욘’에서도 읽을 수 있다. 욘의 ‘그림자’로 살아왔음을 깨닫는 쌍둥이 자매를 통해서다.
“엄청난 열정을 토해내던 사람이 한순간에 몰락하는데, 거기서 오는 페이소스가 굉장해요. 김 교수 말처럼 ‘삶이란 도대체 뭐지’ 싶은 거죠. 우리가 집착하는 것들이 사실 별 의미 없고 헛되죠. 사이좋게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작품입니다.” (고 연출)

'조씨고아' 매진신화 고선웅의 입센…고독이 몸부림 칠때

14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연극 '욘' 연습 장면을 지켜보는 고선웅 연출 모습이다. 6일 인터뷰 중 그는, 김 교수가 “입센은 영원한 질문자”라는 스웨덴 한 연구가 말을 인용하자, 머릿속에 새겨두려는 듯 메모하기도 했다. 사진 서울시극단

14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연극 '욘' 연습 장면을 지켜보는 고선웅 연출 모습이다. 6일 인터뷰 중 그는, 김 교수가 “입센은 영원한 질문자”라는 스웨덴 한 연구가 말을 인용하자, 머릿속에 새겨두려는 듯 메모하기도 했다. 사진 서울시극단

김 교수는 “세기가 바뀌어도 인간에 대한 입센의 질문과 시대 비판은 퇴색하지 않는다”며 “입센을 번역하며 우리 사회도 참 안 바뀐다 싶더라”고 말했다. “지난 학기에 내 번역 대본 사용 의뢰를 해온 대학 연극과 다섯 군데 모두 『민중의 적』을 골랐다. 젊은 세대가 이 사회를 부패하고 썩어 문드러진 곳으로 본다는 데 놀랐다”면서다. 고 연출은 “19세기 세상에 던진 이야기가 AI(인공지능) 시대에도 통한다”면서 “고전을 할수록 그 가치를 느낀다”고 말했다.

1897년 프랑스 파리에서 공연된 연극 '욘' 포스터는 뭉크가 직접 그렸다. 사진 ⓒThe Ibsen Archive, University of Oslo, 서울시극단

1897년 프랑스 파리에서 공연된 연극 '욘' 포스터는 뭉크가 직접 그렸다. 사진 ⓒThe Ibsen Archive, University of Oslo, 서울시극단

이번 연극은 ‘절규’로 유명한 노르웨이 화가 에르바르 뭉크를 오마주한 무대를 선보인다. 욘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그린 자화상 ‘밤의 방랑자’, ‘별이 빛나는 밤’ 등 입센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뭉크는 1897년 파리에서 열린 ‘욘’ 공연의 무대 및 포스터 디자인을 맡기도 했다.

한국엔 입센처럼 힘 있는 대사 없어…창작 여건 개선돼야

‘욘’은 서울시극단 부임 2년 차인 고 연출이 지난해 연극 ‘겟팅아웃’ ‘카르멘’에 이어 직접 연출한 세 번째 작품이다. 김 교수가 “한국은 연출‧연기‧무대는 수준급이지만 희곡은 아직 약하다. 입센‧셰익스피어처럼 힘 있는 대사, 몇십년 후 공연해도 동시대성 있는 작품이 몇 안 된다”고 아쉬워하자, 고 연출은 척박한 공연계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 “좋은 희곡 한 편이 완성되기까지 최소 4~5년 이상 걸리는데 극장은 작가료를 너무 박하게 준다. 그러니 작가들이 웹소설‧드라마‧영화로 떠나거나, 한 작품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못 한다”면서 “좋은 극작가가 뿌리 내릴 수 있도록 창작 여건이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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