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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의 판사와 인공지능이 통하는 점[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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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사회
정재민 지음
창비

흉악한 범죄의 재판 결과를 두고 형량이 너무 낮다는 비판이 종종 나온다. 23년의 공직 생활 중 절반을 판사로 일한 저자는 "예전에 판사로 일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사실상의 항의)도 판사의 형량이 왜 그리 낮으냐는 것"이라고 전한다.

그가 꼽는 여러 이유 중에는 "기존 판결들의 관성의 힘이 상당히 강한 편"이란 점도 있다. 판사들로서는 선례를 벗어나 내린 판결이 상급심에서 뒤집히는 일이 반가울 리 없을뿐더러, 새로운 판결이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라는 정의(正義)와 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저자는 단순명쾌한 답을 속 시원히 제시하기보다 양형기준표, 감경·가중 요소 등을 포함해 형사재판의 면면에 대한 전반적 이해로 독자를 이끈다. 그러면서 유사한 사건들의 양형을 참조하는 작업이 인공지능의 작동 방식과 비슷하단 점에서 '인공지능 판사'의 출현도 긍정적으로 내다본다. 한편으로 판사가 피해자를 대면하는 일이 별로 없는 지금의 재판과 달리, 피해자가 직접 법정에서 형량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는 방법도 제안한다.

책에는 재판, 수사, 교정, 범죄의 원인과 예방 등 범죄 관련 각종 제도에 대한 이해를 돕는 내용을 담았다. 범죄의 원인에 대해서는 경제학적 설명도 소개한다. 이에 따르면 범죄로 인한 이익의 기댓값보다 손실의 기댓값을 높이는 것이 범죄를 막는 대책. 손실의 기댓값을 높이려면 형량만 아니라 검거율을 높이는 방법도 있다. 전자발찌도 그런 예다.

통계에 따르면 최근 10년간(2012~2021) 사기·마약·성범죄는 늘었다. 하지만 살인·강도·폭력·절도와 전체 범죄 건수는 줄었다. 그런데도 시민들의 불안이 커진 이유를 저자는 시간·장소·대상자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성'의 범죄가 급증하고 있는 데서 찾는다. 책에 등장하는 여러 사건과 이를 계기로 달라진 법 조항은 결국 법 집행 이전에 법을 만들고 바꾸는 일의 중요성을 거듭 떠올리게 한다. 책의 마지막 장은 법무부 법무심의관으로도 일한 저자의 경험과 함께 입법에 대해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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