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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큰병원 가랬는데…" 전공의 파업에 환자들 '지방 리턴'

중앙일보

입력

28일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 셔틀버스 정류장에 KTX를 타고 '상경 진료' 온 환자들이 줄을 서고 있다. 김서원 기자

28일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 셔틀버스 정류장에 KTX를 타고 '상경 진료' 온 환자들이 줄을 서고 있다. 김서원 기자

전북 익산에 사는 이모(48)씨는 신장기능저하증인 딸(19)의 치료를 위해 16년간 KTX를 타고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을 오갔다. 그랬던 이씨가 지난 26일 진료 기록지를 받으며 길었던 ‘상경 치료’를 끝내기로 했다. 딸이 완치해서가 아니다. 전공의 파업으로 응급실도 원활히 안 돌아가는데 외래는 오죽할까 싶은 불안한 마음 때문이었다. 이씨는 “집 근처 원광대병원으로 전원하기로 했다”며 “거기도 수련의 병원으로 불안하긴 마찬가지나, 왔다갔다 돈·시간 덜 들고 딸 혼자 다닐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전공의(인턴·레지던트) 집단 사직 사태로 인해 의료 공백이 벌어지자, 서울로 상경해 진료받던 환자들의 ‘지방 리턴’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이씨처럼 장기간 상경 진료를 받던 환자들도 연고지 대학병원이나 2차 병원으로 전원해야할지 고민에 빠졌다. 부산에 사는 서모(69)씨는 2년 전 빅5 병원 중 한 곳에서 하인두암 수술을 받은 후 4개월마다 서울로 오고 있다. 서씨는 “원래 3월 말에 교수 진료 예약을 해놨는데, 파업 때문에 갑자기 4월 말로 밀렸다는 통지를 받았다”며 “의사 한 번 만나려고 스케줄 짜는 게 여간 보통 일이 아니다. 집 근처 병원으로 옮기고 싶긴 한데, 수술을 여기서 받아서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광주에 사는 A씨(72)가 지난 26일 손녀와 함께 용산역 앞에서 세브란스병원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김서원 기자

광주에 사는 A씨(72)가 지난 26일 손녀와 함께 용산역 앞에서 세브란스병원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김서원 기자

실제 일부 지방 종합병원들은 “서울권 병원 환자들의 전원 문의가 눈에 띄게 늘었다”고 한다. 28일 지방의 2차 병원 열 군데를 확인해 보니 서울 상급종합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파업으로 연고지 병원에서 후속 치료를 받아라”고 해서 들어온 환자, 수술 지연으로 고통을 호소하다 지방 병원에 입원한 암 환자 등 서울에서 지방으로 전원하겠다는 문의가 전공의 집단 사직(19일) 전후로 1.5배가량 늘었다고 한다. 지방 상급종합병원 10곳 중 4곳도 평소 수준으로 서울에서 전원할 수 있는지 문의를 받았다고 한다. 전북의 상급종합병원 관계자는 “서울 병원을 추천받은 환자가 서울권 병원에서 입원 불가 통보를 받고 수소문 끝에 다시 돌아온 환자도 있다”고 전했다. 부산의 한 2차 병원은 “대학병원 수술 후 밀려나 정식 전원 절차조차 거치지 않고 급하게 입원하는 환자들이 크게 늘었다”는 전했다.

서울 상급종합병원을 찾는 환자의 상당수는 지방 병원에서 “서울의 큰 병원을 가라”고 추천받은 경우다. 이들 가운데 중증이 아닌 만성질환 환자들은 정기 검진, 약 처방 등 주기적인 진료를 받아야 해서 원활한 진료가 가능한 지방 병원행을 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권 병원의 진료 정상화가 언제 될지 알 수 없고, 이동시간과 비용, 대기 시간 등 금전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20일 오전 서울 수서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서울 시내 대형 종합병원 진료를 받으려는 환자와 이용객들이 병원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20일 오전 서울 수서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서울 시내 대형 종합병원 진료를 받으려는 환자와 이용객들이 병원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역 세브란스병원 셔틀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울산에서 온 60대 여성은 “고향엔 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병원과 의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서울까지 온다”며 “올라오는 열차 안에서 진료가 취소되지 않을까 걱정되긴 했지만, 오늘은 진료 일정에 문제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일부 병원에서 전임의(펠로)들마저 이탈할 기류를 보이자, 다음 검진에 차질 빚을까 두 달 치 약을 미리 받아가려는 환자도 있었다.

그러나 지방 상급병원도 전공의 집단 이탈로 진료·수술 상황이 여의치 않고, 애초에 서울보다 열악한 의료 여건 탓에 밀려드는 환자를 수용하기 버겁긴 마찬가지다. 대구의 한 대형병원 관계자는 “전국적인 파업 상황인지라 우리도 환자 수용에 차질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창원의 종합병원 관계자는 “우리 병원에서도 치료가 어려운 환자가 있어 전원오겠다는 모든 환자를 다 받아낼 순 없다”고 전했다. 일부 상급병원은 병상 가동률이 현재 임계치에 달해 환자 전원을 막는 곳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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