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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 ‘강대강’ 대치 속, 응급실 찾던 80대 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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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의대 증원에 반발한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이 일주일째 접어들면서, 80대 말기암 환자가 진료 가능한 응급실을 찾지 못해 헤매다 끝내 사망하는 사례가 나왔다. 사직서를 낸 전공의가 1만 명을 넘어선 가운데 정부는 전공의들에게 29일까지 진료에 복귀해줄 것을 촉구하면서 ‘의료계와 대화를 제안한다’고 밝혔다.

26일 대전시 소방본부 등에 따르면 80대 여성 환자가 지난 23일 구급차에서 병원으로 이송 중 심정지로 사망했다. 신고를 받은 구급대원들은 환자를 구급차에 태운 후 인근 병원 7곳에 연락을 취했지만 “전문의가 없다”거나 “병상이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어렵사리 진료가 가능한 대전의 대학병원으로 향했지만 환자는 이송 중 심정지로 사망했다. 이 환자가 구급차 탑승 후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는 걸린 시간은 53분이었다. 대전 소방본부 관계자는 “중환자를 이송할 때 평소엔 병원 3~4곳에 전화를 돌린다. 하지만 최근엔 5~6곳은 기본이고 많으면 7곳 이상 문의를 넣어야 한다”고 전했다.

이처럼 의료 현장에서 전공의 부재로 인한 문제가 불거지면서 정부는 29일까지 복귀해줄 것을 촉구했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26일 브리핑에서 “이때까지 돌아온다면 지나간 (업무개시명령 위반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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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차관은 이날 의료계를 향해 “대화를 제안한다”고 했다. 그는 “현재 정부 판단에는 변화가 없다”면서도 “‘정원’을 포함한 모든 의제가 대화의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불법적인 집단행동을 전제로 놓고 국민 생명을 위협하는 상태에서 대화를 요구하는데, 정부가 호응해서 ‘2000명을 줄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고도 했다. 전공의들의 업무 복귀를 전제로 ‘정원’을 포함한 모든 의제에 대해 협상이 가능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정부에 따르면 주요 100곳 수련병원(전공의 95% 근무)을 서면 점검한 결과 소속 전공의의 80.5%인 1만34명(23일 19시 기준)이 사직서를 냈다. 수리된 사례는 아직 없다. 근무지를 이탈한 전공의는 9006명(72.3%)에 달한다. 업무개시명령을 받고 복귀한 전공의 비율은 20% 미만으로 추산된다고 정부는 밝혔다.

한편 대한의사협회(의협)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는 이날 “모두 같이 공멸의 길로 가느냐, 끝까지 저항할 것이냐 선택 시점”이라며 대정부 투쟁 방침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다음 달 3일로 예정된 전국 의사 총궐기대회를 “정부 정책에 항거하는 대장정의 시작점”이라고 밝혔다.

전공의 1만명 사직…정부 “미복귀자, 3월부터 3개월 면허정지”

26일 경기도 의정부성모병원 응급실에서 전공의를 대신해 교수와 간호사가 응급환자를 문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26일 경기도 의정부성모병원 응급실에서 전공의를 대신해 교수와 간호사가 응급환자를 문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의료 공백 장기화 우려가 확산하는 가운데, 환자 피해 사례도 연일 늘고 있다. 수술 지연 31건, 진료 거절 3건 등 의사집단행동 피해신고·지원센터에 접수된 피해 사례는 이날 38건 추가됐다. 17건에 대해 정부는 피해 보상 등 법률 상담을 지원했다.

정부는 응급의료기관 대부분이 정상 운영되고 있다고 밝혔다. 박민수 복지부 차관은 “전체 409개소 중 96%에 해당하는 392개소는 정상 운영되고 있다”며 “상급종합병원의 외래진료 감소율은 2.5% 수준으로 집단행동 이후에도 큰 변동 없이 운영되고 있다. 일부 혼란은 있지만 진료에 큰 차질이 없다”고 했다.

의료 공백에 따른 대책으로 정부는 지난 23일부터 비대면 진료를 모든 병·의원으로 전면 허용한 데 이어 27일부터는 진료지원인력(PA) 간호사가 법적 보호를 받으면서 일할 수 있게 시범사업을 당겨 하기로 했다. 앞서 간호사들이 PA뿐 아니라 일반 간호사까지 전공의 업무를 강제로 떠맡으면서 불법 의료행위에 노출돼 있다며 법적 보호를 요구한 데 대한 후속 조치다.

간호사가 할 수 있는 업무 범위는 의료기관장이 내부 위원회를 구성하거나 간호부서장과 협의해 결정할 수 있게 했다. 박 차관은 “진료 지원 업무 범위를 현장에서 명확하게 할 수 있도록 시범사업 지침을 오늘 안내할 것”이라며 “이번 시범사업은 ‘보건의료기본법’에 따라 시행하는 것으로 현장에서 전공의 이탈로 인한 의료 공백을 메꾸고 있는 간호사들을 법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브리핑에서 박 차관은 전공의들에게 “3월부터는 미복귀자에 대해 법과 원칙에 따라 최소 3개월의 면허정지 처분과 관련 사법 절차 진행이 불가피하다”며 “면허정지 처분은 사유가 기록에 남아 해외 취업 등 이후 진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 달라”고 언급했다. “전공의들 사이에서 ‘한국 의사 그만두고 미국 의사시험 봐서 의사 되겠다’ 이렇게 준비하는 분들도 있는데 한국 의사면허 등이 참조될 것”이라면서다.

의료계는 투쟁 의지를 높이고 있다. 다음 달 3일 전국 의사 총궐기대회를 예고한 의협 비대위는 26일 “집회에서 우리의 뜨거운 열기와 분노를 만천하에 알리지 못하면 앞길은 험난할 것”이라면서 “단 한 분도 빠짐없이 이번 집회에 참여해 그 열기로 이 사회를 놀라게 만들어야 한다. 비대위는 총동원령에 준하는 참여를 호소한다”고 회원들의 결집을 호소했다.

의대생 휴학도 이어지고 있다. 40곳 의과대학 중 14곳 847명이 23~25일 사흘 동안 휴학을 추가로 신청했다. 3개 대학 64명은 휴학을 철회했다. 2개 대학 2명에서 휴학 허가가 있었지만, 정부는 “유급 및 입대 사유로 동맹 휴학 허가는 한 건도 없다”고 밝혔다. 11곳 대학에선 수업 거부가 확인됐다.

한편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은 의사와 정부가 대화를 통해 진료 정상화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보건의료노조는 이날 서울 영등포구 노조 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의사들은 즉각 명분 없는 진료 거부 집단행동을 중단하고 환자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정부는 의사들을 법과 원칙에 따라 처벌하겠다고 압박할 것이 아니라 즉각적인 대화 자리를 만들어 설득하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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