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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 안돼" 돌려보낸 혈액암 환자…10시간 뺑뺑이 후 허망한 결말 [르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응급실 대기실 모습. 대기자가 1명도 없다. 장서윤 기자

2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응급실 대기실 모습. 대기자가 1명도 없다. 장서윤 기자

“아침부터 대학병원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이제 겨우 치료받게 됐네요.”

지난 20일 오후 7시쯤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응급실 출입구 앞에서 만난 황모(59)씨는 “다발성 골수종 환자인 형이 응급실에 간신히 들어갔다”며 안도했다. 혈액암 일종인 이 병으로 평소 세브란스병원에 다니고 있다는 황씨 형은 이날 오전 병세가 악화됐다. 아침에 세브란스병원을 찾았으나 “전공의가 없어 진료가 어렵다”는 안내를 받고 발길을 돌렸다. 이후 병원 1~2곳을 더 돌았다고 한다. ‘응급실 뺑뺑이’를 겪은 셈이다. 돌고돌아 다시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들어가는 데는 10시간이 걸렸다. 황씨는 “암 환자 가족 입장에서는 전공의 파업 시기가 왜 하필 지금인지 야속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황씨가 응급실에 들어간 후 밤늦은 시각까지 한산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뇌종양을 앓는 부인이 상태가 나빠져 이 병원을 찾았다는 박모(67)씨는 “병원에 오자마자 응급실에 들어갈 수 있어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오후 7시쯤 응급실 입실 대기환자는 2명이었는데, 4시간 뒤인 오후 11시쯤에는 대기환자가 0명으로 줄어들었다. 응급실을 오가던 한 간호사는 “환자가 없는 게 아니라 의료진이 없어 수술 건수가 줄어들었고, 환자 이송도 줄었다"며 한산해진 응급실 풍경을 설명했다.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응급실 앞이 한산하다. 이아미 기자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응급실 앞이 한산하다. 이아미 기자

“소아과 전공의 부재로 일부 중증 소아 환자 수용 곤란합니다.”

이날 오후 10시쯤 서울 광진구 건국대병원 응급실은 이런 공지를 중앙응급의료센터 종합상황판에 띄웠다. 같은 시각 ‘인력 부재로 진료 불가’를 표시한 병원 응급실은 서울에서만 14곳이었다. 종합상황판은 전국 병원의 응급실 가용 능력을 한꺼번에 보여줘 환자나 119구급대원이 참고하는 시스템이다. 서울 ‘빅5’ 병원 응급실 간호사 A씨는 “응급실을 평소보다 3분의 1 수준으로 축소 운영하고 있으니 100명 받던 환자를 33명 받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일부 병원은 인근 소방서에 “응급실 운영에 지장이 있으니 경증 환자 이송을 자제해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21일 오전 서울 동작구 서울시보라매병원 응급실 출입문에 "응급실 진료의사 부족으로 진료가 지연되고 있다. 불편하더라도 양해 바란다"는 내용의 안내문이 붙어 있다. 김서원 기자

21일 오전 서울 동작구 서울시보라매병원 응급실 출입문에 "응급실 진료의사 부족으로 진료가 지연되고 있다. 불편하더라도 양해 바란다"는 내용의 안내문이 붙어 있다. 김서원 기자

전공의 부재에 따른 응급실 축소 운영으로 불편을 겪는 환자는 잇따르고 있다. 21일 종합상황판에 따르면 이날 오후 1시 기준 서울 동작구 보라매병원은 심근경색·뇌출혈 등 22개 과목에서 진료가 불가한 상태다.

상급종합병원과 같은 대형병원 이용이 어려워지면서 일부 환자는 인근 공공병원이나 종합병원 등으로 몰리고 있다. 각종 환자 카페에는 “병동에서 ‘2차 병원을 가라’며 퇴원 권유를 받았다. 괜찮은 곳을 추천해달라” “지방에서 서울로 왔는데 수술이 안 된다고 한다. 어떤 병원을 가면 되냐”와 같은 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부산 한 종합병원 관계자는 “주변 대학병원에서 전원(병원 간 이송) 의뢰와 환자 수술을 잘 받아달라는 협조 요청을 받았다”고 말했다.

의료계 안팎에서는 진료 공백 장기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 국립대병원 교수는 “지금 상황은 하나를 빼서 하나를 막는 젠가게임과도 같아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라며 “전공의 공백을 대신 채우는 전임의나 교수 인력이 얼마나 버틸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119구급대원 이모씨는 “종합병원 등 2차 의료기관이 대학병원 진료가 필요한 환자는 아예 안 받겠다고 말해 난감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중증 응급 환자의 진료 차질이 없도록 환자 분산 배정을 유도한다는 방침이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21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 정례 브리핑에서 “현재 상급종합병원 입원 환자 50%는 지역 종합병원이나 병원급에서 진료 가능한 환자”라며 “이들을 적극 연계 회송해 전공의 이탈이 심한 상급종합병원이 중증·응급환자 진료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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