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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렉스' 빠진 유예세대 "아껴야 잘산다? 아끼지 말고 잘살자" [유예사회 갇힌 한국청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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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방의 한 국립대에 재학 중인 강현우(28)씨는 지난해 초부터 필라테스 스튜디오에 투자하는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강씨를 포함해 11명이 창업 자금을 대고, 수익 일부를 투자금에 비례해 배분받는 구조다. 강씨는 2015년 대학에 입학한 뒤 아르바이트와 주식투자로 모은 돈 3500만원 상당을 투자했다. 강씨의 소득은 일정하지 않지만, 두세 달에 한 번씩 사고 싶었던 고가의 옷·신발을 산다. 강씨는 "취업 준비를 함께 한 대학 동기들과 재테크 스터디에 들어갔다가 사업 내용을 듣고 참여했다"며 "수익보단 어릴 때 경험을 쌓고 싶어서 돈을 다 잃을 각오를 하고 도전했다"고 말했다.

한국의 유예 세대(Delayed Generation) 청년들은 취업·결혼 등 인생 시계는 늦추고 있지만 재테크와 소비, 생활 측면에선 이전 세대보다 훨씬 빠른 특징을 보인다.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에선 얼리어답터(새로운 제품·문화를 빨리 받아들이는 사람)를 넘어 퍼스트무버(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사람)를 추구한다. 부모 세대가 빠른 취업→ 저축→ 내 집 마련→ 노후준비라는 대부분이 똑같은 공식을 따랐다면, 유예 세대는 대학생 투자자인 강씨처럼 스스로 속도를 조절하는 자기 주도형(Self-Paced)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대학생 때부터 ETF 투자…오픈 채팅서 정보 얻어”

중앙일보가 1987~2001년생 25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 대학생 때부터 직접 주식투자를 하는 등 재테크에 관심이 많은 동시에 적극적·합리적 소비로 현재의 가치와 행복을 추구하는 ‘재렉스(재테크+플렉스)’ 현상을 보였다. 부모 세대보다 자산과 소득이 줄어든 최초의 새대인 만큼 자산 증식에 대한 열망은 더 크다는 뜻이다. 실제 인터뷰한 25명 가운데 재테크 경험이 있는 사람이 21명(84%)에 달했다. 유형 별로는 주식투자(11명)가 가장 많았고, 예·적금(10명), 암호화폐(3명) 순이었다(중복응답 가능). 이밖에 펀드·환테크·부동산·사업 지분 투자 등을 해본 사람도 있었다. 유튜브와 카카오톡 등 오픈채팅방, 온라인 커뮤니티 등 재테크 정보를 얻는 창구도 다양했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대학 때 가치투자 동아리에서 활동한 직장인 임지연(36)씨는 5년째 베트남·인도 등 해외 투자를 하고 있다. 펀드·주식을 시작으로 지난해부턴 인도 ETF 투자 비중을 크게 늘렸다. 임씨는 "경제·투자 공부는 일찍 시작할수록 좋은 것 같다. 아무것도 안 하면 상대적으로 가난해지는 듯하다"고 말했다.

투자 규모도 적지 않다. 미혼인 공무원 김선진(37)씨는 “10년 정도 모은 돈과 내년 만기인 적금액을 합쳐 경기도 외곽에 20평대 아파트를 살 예정”이라며 “최근 5~6년 사이 집으로 돈 번 친구들을 보니 조금 조급해졌다”고 말했다. 30대는 목돈이 들어가는 아파트 거래 최대 큰손으로 올라섰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해 1~11월 전국 아파트 매매 중 30대(26.7%)가 처음으로 40대(25.9%)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유예 세대인 청년들이 재테크 시장을 선도하는 현상을 두고 전문가들은 사회 진출은 늦지만 직전 세대보다 학력 수준이 훨씬 높고 실시간 투자 정보를 많이 접할 수 있는 ‘모바일 네트워크’ 세상에서 성장한 세대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OECD 교육지표에 따르면 한국 청년(25~34세) 중 대졸 이상 고학력자는 부모 세대 청년기인 1998년 35%→2022년 70%로 두 배가 됐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김진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청년 세대는 국가는 부유한데 개인이 받는 월급으로는 과거 기성세대가 쌓아올렸던 자산 수준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며 “차곡차곡 저축을 하기보단 여러 투자에 관심을 두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원하는 건 내돈내산”…“짠테크하고 꼼꼼히 따져 소비”

유예 세대에게 ‘자린고비’식 소비는 더이상 미덕이 아니다. 부모 세대가 ‘아껴야 잘 산다’를 외쳤다면, 이들은 ‘아끼지 말고 잘 살자’고 한다.

취업 준비생인 정지우(26)씨는 헬스장·술집 등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번 돈으로 전자기기를 수집한다. 휴대전화부터 스피커·게임기까지 새 모델이 나오면 기존 제품은 중고로 팔고 새로 산다. 그는 최근 190만원 상당의 갤럭시 폴드 5를 구입했다. 정씨는 “그때그때 원하는 건 꼼꼼히 따지고 사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회복지사 준비생 김혜원(24)씨는 “사고 싶은 옷이나 가방은 해외 직구나 SNS 공동구매를 먼저 뒤져본다”며 “자금이 모자를 땐 며칠 돈을 안 쓰는 ‘무지출 챌린지’같은 짠테크를 하면서 용돈을 모은다"고 말했다.

인터뷰 대상인 유예 세대들은 ‘젊은 시절 경험’이라는 무형의 가치도 중시했다. 25명 중 본인 돈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온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경우는 16명(64%)에 달했다. 첫 해외여행 시점은 평균 24.5세였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는 반승환(37)씨는 “26세에 첫 회사에 입사한 뒤 마이너스 통장으로 500만원을 마련해 중국 상해로 여행을 다녀왔다”고 소개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집값이 너무 올라 저축을 통해 내 집 마련을 할 수 없다는 좌절감, 동시에 물려받을 자산이 있는 중상류 계층의 외동 자녀들은 부모 세대의 자산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크다”고 진단했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부모의 경제적 지원이 가능한 경우, 소비는 더 과감한 경향을 보였다. 직장인 김재유(35)씨는 아직 결혼 계획은 없지만 신혼집 전세금 등을 지원받을 예정이다. 그는 “결혼 전까지 부모님과 살며 주택비용을 아끼고 있다”며 “넉넉하진 않지만 직장에서 번 돈과 재테크로 모은 돈을 합쳐 자동차를 바꿨다”고 말했다.

“애 낳으라고 할까 봐 결혼 자금도 안 받았다”

부모 세대의 ‘취업→결혼→출산’ 공식을 깨고 자기 주도형 인생을 설계한다는 ‘셀프 페이스’ 특징은 출산·육아 부담이 큰 여성에게 두드러졌다. 승무원인 김소영(33)씨는 지난해 결혼했지만, 남편과 ‘딩크족’(맞벌이 무자녀)으로 살기로 했다. 임신하면 유산 등을 우려해 바로 비행 업무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김씨는 “중학생 때부터 꿈꿔온 직업인데 일을 쉬고 싶지 않다”며 “부모님이 아이를 낳으라고 할까봐 결혼할 때 돈도 한 푼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여자친구와 6년째 동거 중인 안우준(33)씨도 “결혼이란 제도 안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전통적인 가정의 모습에 전혀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방의 한 시청 공무원 김선진(37)씨는 이제 자신의 삶을 찾기로 했다. 부모의 희망대로 특목고→서울 4년제 대학→공무원까지 됐지만 허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부모의 결혼 권유를 거부하고 비혼을 결심했다. 그는 “부모님이 강요한 ‘도장깨기’식 삶이 의미 없다고 느껴졌다”며 “이제야 비로소 내 삶을 사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유예사회에 갇힌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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