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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년생 vs 93년생 인생시간표, 취업·결혼 4년씩 더 밀렸다 [유예사회에 갇힌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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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964년생 황무학(60)씨는 대학 진학부터 졸업·취업·결혼·출산 등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을 거침없이 지났다. 1983년 고교를 졸업하면서 바로 서울 소재 4년제 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고 8학기 만에 졸업했다. 이후 28개월간 학군장교(ROTC) 복무 후 25세에 시중의 한 은행에 단번에 합격했다. 같은 해 곧바로 결혼한 황씨는 27세에 첫째, 28세에 둘째를 품에 안았다. 황씨는 “30대 초반부터 회사에선 초급 관리자 역할을, 가정에선 두 자녀를 책임지는 가장 역할을 했다”고 했다.

다음 세대의 인생 시간표는 많이 늦춰졌다. 1993년생 김도경(31)씨가 대표적이다. 김씨도 2012년 19세에 바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공인회계사(CPA) 자격증을 따느라 졸업은 서른 살인 지난해 2월 했다. 군 복무기간을 빼고도 9년이 걸렸다. 지난해 공무원인 부인과 결혼했지만, 아직 2세 계획은 없다. 두 사람의 직장 경력과 경제 사정 등을 고려해 출산을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김씨는 “약 10년 동안 교제했지만 모아둔 돈이 없어 취업 전까지 결혼을 미뤘다”고 말했다.

김영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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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청년들이 부모 세대(86세대와 X세대)보다 인생의 전환점을 N년씩 늦게 맞는 ‘유예 세대(Delayed Generation)’가 되고 있다. 중앙일보가 2001년생인 23세 대학 재학생부터 1987년생인 37세 직장인까지 25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다. 이들은 부모 세대에 비해 취업·결혼·출산 등을 늦추거나 포기하고, 경제활동이 늦어진 만큼 실질소득과 자산은 줄었다.

남성인 김씨는 직전 세대보다 대졸·취업·결혼을 각각 5·4·5년씩 유예했다. 여성도 비슷했다. 61년생 염두연(63)씨와 92년생 권지은(32)씨를 비교해보니 졸업과 취업, 결혼이 각각 2·2·5년씩 늦었다. 염씨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피아노·미술학원에서 일하다가 이듬해 결혼했다. 첫째·둘째 아이를 낳은 건 각각 25·26세 때였다. 반면 권씨는 취업 전 스펙을 쌓기 위해 지방자치단체에서 1년 간 계약직으로 일했고, 한 학기를 휴학해 인도 배낭여행을 다녀온 뒤 6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올해 32세인 권씨는 “그래도 주변에 비해선 빨리 결혼한 편이라 출산은 한 명 정도만 천천히 할 계획”이라고 했다.

김영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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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세무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이다연(26)씨는 “5년 만난 남자친구도 수험생이라 결혼은 상상도 못한다”며 “어머니가 첫째를 출산한 나이에 나는 독서실에서 공부를 한다”고 말했다. 이같은 유예 현상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는 2019년 2월 ‘밀레니얼 라이프’ 조사 보고서에서 밀레니얼 세대(1981~1996년생)는 장기 침체의 영향으로 이전 베이비부머 세대에 비해 취업은 늦어지고 결혼은 늦추거나 포기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청년들이 ‘잃어버린 N년’은 국가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일자리 미스매치’ 등 사회 전반에 비효율을 높인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국은 N년 유예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게 문제다. 시작은 대입 ‘N수’부터다. 한국교육개발원의 ‘2023 교육통계 분석자료집’에 따르면 지난해 4년제 입학생 33만 439명 중 고교 졸업자가 바로 입학한 ‘현역’ 비율은 68.2%로 1994년 수능 도입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반대로 N수생은 8만 5872명(26%)에 달해 역대 최고치였다. 전체 입학생 넷 중 한 명이 N수생이라는 뜻이다. 김경범 서울대 사범대 교수는 “이공계열, 의학계열에서 재수생이 크게 늘어난 영향”이라고 분석했다.

김영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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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취업을 위한 졸업 유예가 보편화하면서 ‘19세 입학, 23세 졸업’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휴학률(전년도 재적 학생 대비 휴학생 수)은 1980년 10.6%에서 2022년 24.8%로 2.5배로 늘었다. 그 결과 첫 취업 평균 연령은 98년 25.1세에서 2020년 31세로 약 6년 늦어졌다.(취업포털 인크루트)

이는 결혼·출산 유예로도 이어졌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0~22년 사이 초혼 연령은 남성은 27.8세→33.7세, 여성은 24.8세→31.2세로 각각 6년씩 늦춰졌다. 초산도 같은 기간 25.9세→33.5세로 7년 넘게 늦어졌다. 지난해 11월 출산한 강지윤(34)씨는 “산후조리원 동기 18명 중 초산인 14명의 평균 나이가 35세였다”며 “20대 후반인 엄마는 한 명뿐이었다”고 말했다.

김영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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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 세대는 저성장과 경직된 노동시장 등 사회경제적인 구조 속에서 생겨났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금 MZ세대는 과거에 비해 교육·문화 수준이 높아졌지만, 좋은 일자리는 줄어들면서 인생 숙제를 이행하는 시기가 점차 늦어지거나 아예 포기해버리게 되는 구조”라고 말했다.

MZ세대 사이에선 “고성장 시대를 산 부모 세대가 정한 생애 주기를 단순히 늦추는 게 아니라 아예 재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취업과 결혼·출산 등이 더는 인생의 필수 과업이 아니라는 취지다. 남성은 20대 후반, 여성은 20대 초중반이란 1990년대 ‘결혼적령기’ 개념도 사라진 지 오래다. 강정구(37)씨는 “프리터(아르바이트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 비혼자, 딩크족(맞벌이면서 자녀가 없는 부부) 친구가 무리마다 한 명씩 꼭 있다"고 말했다.

유예 사회는 ‘저성장’ ‘고용 없는 성장’ 추세에 변화가 없는 한 앞으로도 오래갈 전망이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취직도,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겠다는 ‘N포세대’가 사실은 포기가 아니고 상황이 개선될 때까지 미뤘던 것”이라며 “정부에선 막대한 예산을 퍼부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겠다 하지만, ‘결혼과 출산은 행복의 족쇄’라는 가치관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유예 현상이 10년이 될지, 끝없이 지속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유예사회에 갇힌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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