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 예멘 내 후티 근거지 정밀 공습
AP·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미·영국군은 이날 전투기·선박·잠수함을 동원해 함대지 미사일 등 100여 개의 정밀 유도탄으로 예멘의 수도 사나와 홍해 항구 도시 호데이다, 북서쪽 사다하 등 16개 지역에 있는 후티가 사용하는 방공 시스템·무기 저장소 등 최소 60곳을 공격했다. 호주·바레인·캐나다·네덜란드의 지원을 받았고, 사정거리가 1250∼2500㎞에 이르는 토마호크 미사일까지 사용했다. 미군이 예멘에서 후티를 공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성명에서 "세계 무역로를 위협한 후티의 전례 없는 공격에 직접적 대응으로 후티가 사용하는 예멘의 여러 목표물을 공격하는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영국 공군 전투기가 표적 공격 수행을 도왔다"며 "이번 공격은 자위권을 위한 제한적이고 필요한 비례적인 조치"라고 밝혔다. 한국을 포함한 10개국은 미·영국군 공습을 지지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고위 당국자는 "이번 공격은 후티의 군사 능력을 겨냥한 것으로, 정밀 타격해 민간인 피해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면서 "이번 조치로 후티의 공격 역량이 약화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전했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중동 내 확전을 촉발할 우려로 후티 공격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후티가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를 지지한다는 명분으로 지난해 11월 19일부터 홍해에서 민간 선박을 27차례 공격하자 결국 군사 대응에 나섰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에 국력의 대부분을 쏟아부었다는 비판을 미국 내에서 받아 올해 대선을 앞두고 후티에게 소극적이었다"면서 "그러나 후티의 공격이 날로 대담해지면서 단호하고 강경한 미국을 보여줘야 한다는 요구가 나왔다. 이번 공격은 후티가 자초한 것"이라고 짚었다.
후티 "홍해 넘어 아라비아해도 공격"
그러나 후티는 굴복하지 않고 보복을 경고했다. 알자지라에 따르면 후티의 후세인 알-에지 외무 부장관은 소셜미디어(SNS) 엑스(X·옛 트위터)에 "미·영 선박·잠수함·전투기에 의한 대규모 공격을 받았다"며 "미·영은 높은 대가를 치르고 이 노골적인 침략의 모든 끔찍한 결과를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또 다른 후티 고위 관계자는 "이 지역에 있는 미·영 기지를 표적으로 삼고, 홍해는 물론 아라비아해도 공격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후티가 순순히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이다. 성일광 고려대 중동이슬람센터 연구위원은 "후티와 미국은 서로 한대씩 치고 맞는 방식으로 무력 충돌을 이어갈 것"이라고 관측했다.
이로 인해 이란을 비롯해 후티·하마스·헤즈볼라(레바논 무장 정파) 등 이른바 '저항의 축'에 속하는 친이란 세력과 미국·이스라엘 등 친서방 세력이 직접 충돌하는 구도가 이뤄졌다. 1973년 4차 중동전쟁에 이어 51년 만에 5차 중동전쟁으로 확전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이스라엘의 하마스 고위급 소탕작전이 가자지구에 이어 레바논·시리아로 넓어지더니 미·영의 예멘 공습까지 이뤄지면서 무력충돌 지역이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친이란 세력 공격 뒤에는 이란이 있다고 믿는다. 미 고위 당국자는 이날 "이란은 후티가 홍해 공격을 수행하도록 정보를 제공했다"면서 "이란이 모든 단계에서 확실히 관여했고 우리는 그 책임을 묻고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전날 이란 해군이 오만만 해역에서 미 유조선 세인트 니콜라스호를 나포했다. 이란은 해당 유조선이 자국의 석유를 훔쳐 미국에 제공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란이 후티의 홍해 공격과 함께 오만만이 있는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위협을 동시에 가한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긴장 높아져도 소규모 전쟁 예상
다만 BBC는 바이든 대통령이 공식 성명에서 이란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을 짚으면서 "이는 바이든 대통령이 후티 공격을 억제하는 한편 중동 지역에서 추가 전쟁을 피하려는 계산된 도박을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백승훈 한국외대 중동연구소 전임연구원도 "이스라엘이 최근 헤즈볼라·하마스 고위급을 레바논·시리아 영토에서 공격해 친이란 세력과 직접 충돌 가능성이 높아지자, 미국이 예멘 공습으로 '이스라엘 뒤에 우리가 있으니 확전하지 마라'고 확실한 경고를 날린 것으로 보인다"면서 "아울러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이번 이스라엘 방문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등에게도 더는 상황을 악화시키지 말라고 경고했을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나 후티·헤즈볼라 등 공격 주체가 많아지면서 전쟁의 불씨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알리 알 부카이티 전 후티 대변인은 이스라엘 방송 채널12에 "후티는 이란의 지시만 수행하는 꼭두각시가 아니다. 주도적으로 더 큰 공격을 일으킬 수 있으니 얕보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래도 대다수 전문가들은 이집트·시리아·리비아 등이 참전한 4차 중동전쟁처럼 중동 전역이 들썩이진 않고 소규모 전쟁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백승훈 전임연구원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집트와 내전으로 여력이 없는 시리아, 홍해를 세계 경제 거점으로 구축하려는 사우디아라비아 등은 참전을 안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사우디 외교부는 이날 성명에서 미·영의 예멘 공습에 "크게 우려하고 있다"며 확전 자제를 촉구했다.
국제유가 들썩, 110달러까지 상승 베팅
중동에서 긴장감이 고조되면서 국제유가도 심상치 않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12일 서부텍사스산 원유(WTI)와 브렌트유가 약 4% 상승했다. 브렌트유는 올해 처음으로 배럴당 80달러를 넘어섰다. 석유전문매체 오일프라이스닷컴은 중동 분쟁이 격화될 경우 현재 배럴당 110달러까지 오를 것이라는 베팅이 나온다고 전했다. 앞서 4차 중동전쟁에선 유가가 최대 4배 상승했다.
유광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아프리카중동팀 전문연구원은 "유가가 다소 오를 수 있으나 그 상승 폭이 매우 크진 않을 것"이라면서 "중동산 원유에 의존하던 50여 년 전과 달리 2000년대 셰일가스 채굴이 본격화하면서 미국의 원유 생산량이 가장 많아지는 등 시장 상황이 달라졌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원유의 약 70%를 중동에서 가져오는 한국 시장에는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미 유조선이 나포된 호르무즈 해협은 중동 산유국이 원유 수출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를 통해 들여오는 원유와 카타르·오만 등에서 들여오는 액화천연가스(LNG)의 수입이 집중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해운협회 관계자는 "호르무즈 해협에서의 긴장이 지속되면 보험료 등 선박회사가 부담하는 비용이 상승할 수 있고, 미와 동맹국인 우리 유조선도 나포될 가능성이 있어 선원들의 승선 기피까지 발생할 수 있다"며 "에너지 안보 위협이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