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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 상징' 피아노의 굴욕…동네서 '띵띵띵' 소리 사라졌다,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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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경기도 안산시의 한 피아노 업체 창고에 중고 피아노가 가득 차 있다. 천권필 기자

경기도 안산시의 한 피아노 업체 창고에 중고 피아노가 가득 차 있다. 천권필 기자

10년 넘게 아이들 가르쳤던 피아노인데….

지난 23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의 한 상가건물 2층에 있는 피아노 학원. 성인 남성 4명이  피아노 10여 대를 계속해서 계단 아래로 옮겼다. 한 대에 250㎏에 달하는 피아노가 힘겹게 트럭에 실려 학원을 떠났다. 10년 넘게 학원을 운영했다는 학원장은 이를 지켜보며 “마음이 좋지 않다. 주변에 초등학생 수가 계속 줄어서 결국 문을 닫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학원장은 피아노 13대를 처분하고 오히려 100만원을 업체에 지불해야 했다. 그랜드 피아노 한 대는 돈을 받고 팔았지만, 일반형 피아노는 대당 8만원씩의 처리 비용을 냈다.

경기도 안산시의 한 피아노 학원에서 중고 피아노를 옮기는 모습. 천권필 기자

경기도 안산시의 한 피아노 학원에서 중고 피아노를 옮기는 모습. 천권필 기자

과거 ‘중산층의 상징’이었던 피아노가 이제는 버리기도 어려운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1980~1990년대에 붐이 일었을 때 불티나게 팔렸던 피아노들이 최근 들어 쏟아져 나오고 있어서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전문 업체를 통해 피아노를 처분하려면 보통 10만 원 안팎의 처리 비용을 내야 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중고 피아노로 팔 수 있었지만, 이젠 쓰레기와 마찬가지가 된 것이다. 최근 피아노를 폐기 처분한 김모씨(51)는 “유치원생 딸에게 사줬던 가장 비싼 선물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쓰레기 취급받으니 착잡하다”고 말했다.

“한 마디로 피아노를 팔겠다는 공급은 어마어마한데 수요는 없는 상황이에요. 1년 전만 해도 30만 원을 받고 팔 수 있었던 쓸만한 피아노를 이제는 되려 돈 내고 버리라고 하니 피아노 주인들도 황당해하죠.”

30년 넘게 피아노 판매 업체를 운영한 이우희 포리피아노 대표. 천권필 기자

30년 넘게 피아노 판매 업체를 운영한 이우희 포리피아노 대표. 천권필 기자

30년 넘게 피아노를 판매한 이우희 포리피아노 대표(57)도 이렇게 급격히 피아노의 가치가 추락한 건 처음이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고쳐서 다시 팔 수 있었던 피아노도 이제는 팔 곳이 마땅치 않다 보니 부숴서 폐기 처분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보관할 자리도 없다…“10대 중 8대는 폐기”

피아노를 폐기 처리하는 모습. 사진 포리피아노

피아노를 폐기 처리하는 모습. 사진 포리피아노

그렇다면 처분한 피아노는 어떻게 처리되는 걸까. 학원에서 피아노를 실은 그의 트럭을 따라 창고로 이동했다. 창고로 온 피아노들은 상태에 따라 수리해서 중고로 다시 판매하거나 폐기 처분된다. 피아노 한 대를 만들고 소리를 유지하려면 복잡한 공정과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지만, 폐기되는 과정은 의외로 단순하다. 피아노를 부숴서 목재와 철재를 분리한 뒤에 목재는 폐기하고, 피아노의 뼈대 역할을 하는 100㎏가량의 철재는 고철로 판매해 재활용한다.

피아노의 뼈대 역할을 하는 철재. 고철로 재활용된다. 천권필 기자

피아노의 뼈대 역할을 하는 철재. 고철로 재활용된다. 천권필 기자

대형 창고는 중고로 팔기 위해 보관 중인 300여 대의 먼지 쌓인 피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피아노를 판매 중인 이용재씨(29)는 “피아노를 가지고 있어 봤자 자리만 차지하고 돈도 안 되니 버릴 수밖에 없다”며 “예전에는 절반 이상을 중고로 팔았지만, 요즘엔 10대를 가져오면 8대 정도는 폐기한다”고 설명했다.

경기도 안산시의 한 피아노 업체 창고에 중고 피아노가 가득 차 있다. 천권필 기자

경기도 안산시의 한 피아노 업체 창고에 중고 피아노가 가득 차 있다. 천권필 기자

저출산 직격탄 맞은 피아노 학원…“대신 영어·수학 학원 생겨”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한때 중산층 가정의 필수품이었던 아날로그 피아노가 애물단지로 전락한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저출산이다. 학생 수가 급감하면서 피아노 등 예체능 교육 시장이 직격탄을 맞았다. 중앙일보가 최근 5년간 학원 현황을 분석한 결과, 서울 시내 피아노 학원 수는 2019년 1295개에서 올해 1133개로 12.5%가량 줄었다. 반면, 국어와 영어, 수학 등 대학 입시와 직결되는 학원 수는 늘었다.

서울 노원구에서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는 이모씨(64)는 “인근에 피아노 학원이 4개나 있었는데 우리 학원 빼고 모두 폐업했고, 없어진 자리엔 영어·수학 학원이 들어왔다”며 “아이들이 없어진 것도 맞지만, 그나마 있는 아이들 마저 영어, 수학 학원으로 빠진다”고 했다.

한국산 피아노 사 가던 중국 판로 막혀 

중국으로 수출되는 중고 피아노. 사진 포리피아노

중국으로 수출되는 중고 피아노. 사진 포리피아노

중고 피아노를 수입해왔던 중국 시장의 판로가 막힌 것도 단기적인 피아노 시장의 붕괴를 불러왔다는 주장도 있다. 한국이 1980~90년대에 피아노 사주기 열풍이 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2010년대 이후 두터워진 중산층 사이에서 피아노가 필수품으로 자리 잡아 판매량이 급증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중국 내수 시장이 얼어붙은 데다가 중고 피아노 수입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사실상 수출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한 피아노 중고 업체 대표는 “중국에서 예전과 달리 2000년대 이후에 생산된 제품만 찾는데 국내에서는 30년 넘은 피아노들만 쏟아지고 있다 보니 가져와도 팔리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층간소음 갈등에…“더는 집안 필수품 아냐”

가정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모습. 중앙포토

가정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모습. 중앙포토

층간소음으로 인해 집안에서 피아노 사용이 어려워지면서 아날로그 피아노가 가정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 영향도 있다. 디지털 피아노가 그 자리를 일부 대체했지만, 앞으로 집안 필수품으로서 피아노의 가치는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 대표는 “이제는 가정에서도 입시 등을 위해 필요할 때 피아노를 빌려서 사용하는 등 피아노도 공유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며 “중고 피아노 시장도 점점 고가 브랜드 제품들 위주로 고급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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