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애쓰다 간 인권변호사(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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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해오다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 영안실에 마련된 고 조영래변호사(43)의 빈소에는 이틀째 조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고인의 동료·선후배들은 「아까운 인재」의 너무도 허망한 죽음을 안타까워 하면서 인권운동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고인을 추모했다.
8월27일 서울대 병원에서 폐암진단을 받고 전남 곡성 등지와 병원에서 요양과 치료를 받아오다 12일 40대 초반의 짧은 생을 마감한 조변호사.
65년 서울대 전체수석으로 법대에 입학한 그는 71년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나 서울대 내란음모 예비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으로 70년대를 투옥과 수배속에서 대부분 보냈다.
10·26으로 사면돼 82년 8월에서야 사법연수원을 마친 조변호사는 그뒤 줄곧 인권운동에 앞장서 왔다.
부천서 권인숙양 성고문사건과 서울 망원동 수재민 피해보상 소송이 그가 맡았던 대표적인 사건.
그는 끈질긴 노력으로 여대생을 성고문한 권력기관의 부도덕성을 폭로하고 고문경관 문귀동이 법의 심판을 받게 했다. 84년9월 대홍수로 인한 서울 망원동 수재민 집단소송을 맡았을 때는 3년 동안의 싸움끝에 수해가 「인재」였음을 밝혀내기도 했다.
87년 상봉동주민 진폐증 소송과 여성 조기정년제 철폐소송 등 그는 여성·근로자의 권익옹호와 공해문제 등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왔다.
한 조문객은 이렇듯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감싸온 고인에 대해 『「방생」사상을 갖고 살아온 사람』이라며 『그는 묶인 사람을 풀어내고 잃은 것을 되찾아 주려는데만 매달려 일해오다 우리곁을 떠났다』고 추모했다.<김남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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