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이 한국 경제의 ‘뉴노멀’(새로운 기준)로 굳어지고 있다.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올해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보다 낮은 성장률을 기록하며, 3년 연속으로 평균에 미달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한국이 1996년 OECD에 가입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수출 부진이 길어지는 상황에서, 고금리ㆍ고유가라는 파고까지 덮치며 저성장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
수출액 감소율, G20 국가 중 1위
24일 기획재정부와 OECD 등에 따르면 7월 한국의 수출액은 지난해 같은 달보다 15.5% 감소했다. OECD 37개 회원국 중 아직 통계가 나오지 않은 콜롬비아를 제외하면 4번째로 수출 감소 폭이 컸다. 1~3위 국가는 노르웨이(-50.2%)ㆍ에스토니아(-19.4%)ㆍ리투아니아(-16.4%)다. G20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는 국가 중에선 한국의 수출액 감소 폭이 가장 컸다.
7월 수출액 감소 폭은 G20(-6.4%), G7(-0.9%)과 비교하면 차이가 두드러진다. 전 세계 수출이 둔화했다고는 하지만, 한국이 유독 부진했다는 의미다. 6월을 제외하면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모두 전년 대비 수출액 감소 폭이 OECD 회원국 4위 이내를 차지했다.
수입은 수출보다 더 가파른 속도로 줄고 있다. 한국의 7월 수입액은 1년 전보다 25.4% 감소했다. OECD 회원국 중 최대 감소 폭이다. 8월 들어 유가가 다시 오르고 있지만, 7월까진 국제유가를 비롯한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인해 수입액이 줄었다. 또 수출이 감소하다 보니 생산을 위해 원자재나 중간재를 수입하는 양도 줄었다는 풀이가 나온다.
성장률, 3년 연속 OECD 평균 하회 전망
수출 부진은 성장률 둔화로 이어지고 있다. OECD는 지난 19일 올해 한국 경제가 전년보다 1.5% 성장할 것이라며 기존 6월 전망치를 유지했다. 미국ㆍ일본을 비롯한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상향 조정한 것과 대비된다.
한국 경제성장률은 OECD 평균을 3년 연속 밑돌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2021년 OECD 회원국 평균 성장률은 5.8%, 한국은 4.3%였다. 지난해엔 각각 2.9%와 2.6%로 한국이 평균보다 0.3%포인트 낮았다. OECD 평균 성장률 전망치는 지난 6월엔 1.4%였는데 주요국의 경기 회복세를 고려하면 11월 전망 때 상향 조정이 유력하다. ‘아시아의 4마리 용’, ‘한강의 기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며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던 한국이 이젠 ‘성장 중위권’으로 굳어지는 모양새다.
한계 드러낸 반도체·중국 의존 수출경제
2021∼2022년 2년 연속으로 OECD 평균 이하의 성장률을 기록한 나라는 한국 외에 라트비아ㆍ스위스ㆍ체코ㆍ독일ㆍ슬로바키아ㆍ핀란드ㆍ룩셈부르크ㆍ일본 등이다. 일본은 하반기 들어 뚜렷한 경기 회복 추세를 보여 올해는 ‘평균 이하 그룹’에서 탈출할 것은 물론,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한국을 앞설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와 대중국 수출에 의존한 한국 경제가 한계를 드러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반도체라는 단일 품목에 의존해 수출과 성장이 호황을 누렸지만, 반대로 반도체 사이클에 따른 불황이 닥치자 반작용도 크게 나타나고 있다”라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중국 경기회복이 더딘 게 가장 큰 원인”이라며 “중간재뿐만 아니라 중국으로 수출되는 최종 소비재가 줄어든 영향도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을 글로벌 핵심 공급망에서 배제하려는 미국의 경제안보 전략까지 고려한다면, 높은 중국 의존도는 장기적으로도 한국 경제에 상당한 딜레마로 작용할 수 있다.
전망도 가시밭길이다. 당초 정부가 상반기엔 경기가 둔화했다가 하반기 회복할 것이라는 ‘상저하고’ 전망을 제시한 건 중국 경기회복 기대 때문이다. 그러나 부동산 채무불이행(디폴트) 위험 등 중국 경제가 부진하면서 한국 수출 회복이 더뎌지고 있다. 올해 1~7월 한국 총수출액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9.6%다. 주력 수출품인 메모리 반도체는 대중국 수출액 비중이 45%에 달한다. 높은 중국 수출 의존도가 회복의 발목을 잡는 형국이다.
한국에 더 아픈 고금리 장기화
여기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5%대 기준금리를 내년 하반기까지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 등 고금리 장기화도 예고됐다. 긴축이 앞으로도 이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만큼 세계적인 수요 감소로 이어진다. ‘강달러’도 오랜 기간 지속할 예정이다. 비싸진 달러로 각종 원자재 가격 부담은 커지고 기업의 생산비용이 증가한다. 제조업 수출 중심의 경제 구조에 타격이 더 클 수밖에 없다. 또 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인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로 인해 민간 소비 여력도 크게 줄어들 것이란 풀이가 나온다.
여기에 국제유가는 배럴당 100달러 재돌파를 가시권에 두고 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일단은 물가가 걱정이고, 유가가 올라가면 전체적으로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교역 감소가 이어질 수 있다”며 “한국처럼 수출에 많이 의존하고 통화정책 수단이 제한적인 국가에는 충격이 더 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주 실장은 또 정부의 ‘상저하고’ 전망에 대해서도 “고금리와 유가 상승에 따른 원자재 가격 부담은 수출 중심인 한국 경제에 치명적”이라며 “하반기에 극적 반등이 나타날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말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내부적으로는 인구 감소가 예정된 상황에서 이젠 저성장이라는 뉴노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김동헌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미국과 금리 차가 이미 큰 상황에서 한국만 금리를 내릴 수는 없고, 재정 여력도 코로나19를 겪으면서 한계인 상황이다. 단기적으로 정부가 외부 충격에 따른 저성장을 막을 해법이 없다는 의미”라고 짚었다. 그는 이어 “내부적으로는 인구 감소에 대비해 이민자를 적극 수용할 수 있는 길을 열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중장기적으론 중국을 대체할 수 있는 수출국 다변화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