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 인상엔 체면도 없나(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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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국회의원들이 예산심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세비를 무려 29.4%나 인상하는 안을 슬쩍 끼워 통과시킨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그 무책임성과 둔감증에 대해 아연하지 않을 수 없다.
국회 운영위는 8일 「국회의원 수당 및 지원경비 인상안」을 여야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국민 대다수가 그 소식을 듣고 국회의원들이 해도 너무 했다는 비판적 시각을 넘어 의원들의 의식상태를 의심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당적 이해다툼으로 날이면 날마다 쌈박질이나 하는 주역쯤으로 비쳐온 여야가 모처럼 팔을 걷어붙이고 화기롭게 한 「큰일」이 세비 대폭인상이라니 더 이상 말이 안 나온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인 집단이기주의의 횡행을 말리고 치유하는 데 앞장서야 할 국회와 국회의원들이 그 극치를 부끄럼없이 행동화했다는 데 문제가 심각하다. 공익을 가장 우선시키고 민심에 가장 민감해야 할 국회의원들이 사익 챙기기에 민심을 외면한다면 이 나라는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우리는 의원들의 세비가 넉넉하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야당 의원들의 쪼들리는 자금사정의 고충을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다.
그렇다고 의원들이 나라의 형편이나 자신들의 사회적 지도성과 책임감을 도외시한 채 세비를 대폭 인상해도 된다는 논리에는 결코 찬성할 수 없다.
잘 알다시피 내년 우리 경제는 지극히 어두운 전망을 앞에 두고 있다. 그래서 정부는 물가와 근로자의 임금인상률을 한자리 수로 억제하는 지침을 마련하고 있다.
정치권이 이같은 난국을 국민 모두의 합심력으로 뚫고나가기 위해 정부의 고육적 정책을 앞장서 도와주어도 시원찮을 형편이다. 그런데도 국회가 이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세비인상을 해도 되는지 준엄하게 묻고 싶다.
또 냉정하게 말하면 국회의원은 봉급자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다. 의원 스스로가 만든 「국회의원 수당 및 지원경비 인상안」이라는 법안명칭만 봐도 의원들은 스스로를 국가에 대한 봉사자로서 명예직으로 치부하고 있음이 명백해진다.
따라서 의원들이 이른바 세비를 생계유지 및 활동경비조달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 발상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의원의 겸직을 허용한 현행 제도도 바로 국가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의원상을 상정하고 있지 않은가.
더욱 터놓고 얘기한다면 국회가 무슨 큰일을 했다고 느닷없이 그런 짓을 기습적으로 결행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놓고 어떻게 구슬땀을 흘리면서도 한자리 수 임금인상률에 묶여야 하는 근로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며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국민들에게 호소할 수 있겠는가.
가관인 것은 내년 예산안이 팽창예산이라고 펄펄 뛰던 의원들이 상임위 예비심사에서 6천4백여 억 원이나 순증시킨 일이다. 세비 같은 불요불급의 비목을 대폭 늘리니까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여야는 예결위와 본회의 심의에서 스스로의 잘못을 고치는 일에 인색해서는 안 되며 그 바탕은 세비 인상 같은 스스로의 몫을 키우는 비목에 대해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는 데서 찾아야 함을 거듭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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