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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7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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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 남로당 지하총책과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공산주의 결코 「낙원」아니었다”/연재를 끝내고/북에 속아 조국 못찾는 신세/제2의 6·25 없게 「힘」축적 절실
나라의 주권을 다시 찾으려는 1919년 대한독립 만세소리와 같이 이땅에 태어난 나의 일생은 무엇이던가.
왜 그처럼 험난한 길을 걷고 말았던가. 우리 어머니는 늘 『너는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안타까워 하셨다. 재산이 없나,학벌이 없나,가만히 있으면 잘 살 것인데.
내가 독립투쟁과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필연성은 없었을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은 시대병이라 하며,어떤 사람은 나를 천치라고 경멸한다. 곰곰 생각해 보면 이 나라가 나 혼자의 나라도 아닌데 내가 왜 그렇게 미쳤던가 알 수가 없다.
나는 우리나라의 독립에 유리하다면 그것이 비록 악마라도 손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대학 연구실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한 학자도 아니다. 다만 만주에서 무슨 장군이 일본군을 무찔렀다하면 그런 장군이 되고 싶었고 국내에서 누가 불굴의 투사라면 그런 불굴의 투사가 되고 싶었다.
하여간 독립투쟁의 대열에 끼고 싶었다. 내딴에는 잘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가서 부닥친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피바다였었다. 그것은 나의 본의와는 달리 모두가 마이너스의 신호였었다.
마르크스주의가 국가정책으로서 현실화할 때 그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잘 몰랐다.
물론 스탈린이나 모택동이나 김일성의 정책에 의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과는 다른 마르크스주의도 있을 것이라 생각도 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스탈린식 밖에 없었다.
그때는 스탈린식에서 벗어나면 제국주의의 간첩으로 추락되고 말았었다. 6·25 전쟁 도발은 마르크스주의에 따른 필연적인 전쟁이 아니었다. 김일성은 이 내전도발로 우리나라를 망쳐버리고 민족 반역자가 되고 말았다.
한국의 민주화라는 것은 김일성이 우리를 침범하지 못하게 우리의 체질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김일성 부자가 대를 이어가면서 주장하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주체」라는 허구를 청산시켜 민주적으로 통일하기 위한 것이다.
중앙일보사에서 나에게 회상기를 써달라할 때 나는 주저했다. 아무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거니와 회상기라는 것은 옷을 활짝벗고 알몸을 대중앞에 나타내 치부를 보이는 것이다. 나는 지금 살아 있는 미이라에 불과하다. 나의 조국,나의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해외에서 유랑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격동의 시대를 피하지 않고 최전선에 서서 걸어왔었다. 마르크스주의를 내딴에는 노동자를 구하는 주의라고 믿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정권을 잡자 그것은 독재와 탄압과 착취의 기구로 변하는 것을 북조선의 김일성 정권에서 발견했을 때 나는 울래야 울 수도 없었다.
북조선의 인민정권이란 김일성 왕조의 세습정권이며,국유재산은 김일성 개인의 사유재산이며 인민군과 노동당은 김일성의 사병이며 도당에 불과했다.
김일성체제가 이러함에도 한국에서는 김일성을 도와 주어야 하며 김일성을 고립시켜서는 안되며 비판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김일성체제를 청산해 북한 동포를 공포정치에서 구출하는 길이 통일의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민족반역자를 「선의의 동반자」라고 규정한 것은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이리를 친구라고 규정한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을 전복시키려고 갖은 불법테러를 한 그가 어찌 우리와 공존·공생한단 말인가.
6·25때 월남한 3백만명의 북쪽 동포,그리고 50만명의 월북 동포 등 이산가족들을 생각할 때 통일은 시급한 문제다.
통일이 아무리 시급한 명제라하더라도 김일성 부자 유일정권과는 안된다는 것을 나는 뼈를 깎아내는 체험으로 알게 되었다. 나의 우매함을 자기반성하면서 체험하지 못한 동포들에게 알리기 위해 내키지 않은 회상기를 쓰게 된 것이다. 1년 4개월에 걸쳐 귀중한 지면을 주신 중앙일보 여러분과 졸렬한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필자 박갑동씨>
◎회상기를 읽고/「격동기 한반도」 생생히 증언/“「보천보습격」 김일성이 주동안했다”에 주목
지난 3월의 일이다. 우리 학교에서는 초대 총장이었던 심산 김창숙 선생의 동상 제막식이 있었다. 여기에 참석하러 왔던 H신문사 사장이 내 연구실에 들러 오래간만에 환담의 기회를 가졌다. 그 친구의 말이 요새는 중앙일보를 보는 재미에 산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박갑동씨의 회상기 때문이란 것이다. 신문이 오면 그것부터 찾아 읽는데 실리지 않은 날엔 영 재미 없다는 것이다.
사실 나도 그 회상기 때문에 한동안 끊었던 중앙일보를 다시 보고 있던 터였다. 우리 동네의 배달 사정이 나빠 끊었던 것을 연구실에서 다시 주문해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 회상기가 1백71회로 끝났다. 더 써야 할 것이 있을 법한데 하는 아쉬움을 남기는 끝이다. 사실 여러 사람들이 박씨의 글에서 그의 표현대로의 환상이 아닌 새로운 사상형성과 그에 따르는 행동이 어떻게 표현될 것인가를 확인하고 싶어 했는데 그렇지 못한 채로 끝난 것이 여간 아쉽지가 않다.
그러나 그의 회상기는 격동하는 한반도 정세의 전수를 읽는데 적지않은 교훈을 던져 준다. 조선공산당이나 남로당이 정부·군대·경찰,심지어는 우당에까지 프락치를 넣어 활용하던 증언이라든가 지하당이 어떻게 운영되며 어떻게 활동했던가를 털어놓은 대목 같은 것은 오늘에 있어서도 요긴한 산 지식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특히 해방초기부터의 북조선측 대남 공작의 실상이 많이 소개되었는데 그것으로써 조선공산당에 분열이 생기고 박헌영파가 갈수록 궁지에 몰렸던 사실은 필자가 일찍이 연구했던 내용과도 부합되어 흥미진진했다.
박씨의 회상기 중에서 가장 수긍이 가지않는 점은 신탁통치 문제를 놓고 모두가 찬탁을 했더라면 통일된 임시정부의 수립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본 그의 견해다.
이것은 당시의 조선공산당의 견해이기도 했다. 그러나 흘러간 세월은 이러한 견해들이 오류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 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 대표는 좌익만으로 되는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여 분열주의로 나갔었다.
뿐만 아니라 미 소 공위의 사업과는 아랑곳 없이 소련은 북한에다 1946년 2월8일에 이미 김일성 정권을 세워 이른바 「민주기지」의 구축에 착수했었다.
민주기지 노선이야말로 스탈린의 지령(1945년 9월20일)에 따라 김일성 정권이 당면 과업으로 삼았던 선 분단 후 공산통일의 혁명노선이며 분열주의 노선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유엔결의의 남북 총선거를 소련과 김일성이 거절할 때에 역력히 입증되었었다.
찬탁으로 좌우와 남북을 총 망라한 통일된 임시정부를 바라봤다는 것은 허무한 기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박씨의 증언중에 가장 주목을 받아 마땅할 대목은 보천보 습격사건의 주인공이 북한의 김일성이냐 아니냐의 문제다. 물자 조달의 약탈사건에 불과했던 것을 백배로 미화 과장해 놓고 김일성의 항일성전으로 삼고 있는 것이 북한인데 박씨는 박금철·박달의 증언(연재 50회)과 만주 유격대 출신 만년 소좌의 증언(연재 1백59회)을 빌려 지금의 김일성은 보천보 습격의 김일성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이는 필자의 연구와도 부합한다.
회상기에는 심산선생의 말씀이 옮겨진 대목이 있다. 「땅이 작아서 소국이 아니라 사대주의 소인배가 많아 소국」이라고. 과연 그렇다. 이 근년의 우리 근·현대사 해석에서 판을 치는 사대주의 풍조는 말 못할 지경이다.<이명영 성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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