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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최우석칼럼

서울의 '기이한 평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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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지금부터 약 5세기 전 당시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이교도인 오스만 튀르크에 포위를 당했다. 튼튼한 성벽과 바다, 또 기독교 우방의 구원을 믿고 비장한 방어전을 편다. 포위군은 병력이 우세했고 위력적인 신형 대포가 있었다. 53일간의 공방전 끝에 성이 무너지자 성안은 공포와 패닉에 휩싸였다. 그 넓은 소피아 성당엔 사람들이 가득 몰려들어 기적과 구원을 빌었다. 성안엔 800이 넘는 교회와 수녀원이 있었는데 모두 사람들로 꽉 찼다 한다. 승리한 이슬람군은 소피아 성당을 당장 이슬람사원으로 바꾸도록 명령한다. 그래서 몇 군데를 급히 손질하고 모스크로 썼는데 그것이 오늘의 모습이다. 천년 역사의 기독교 수도가 이슬람군주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니 그 후의 어려움은 짐작할 수 있다.

밝은 2층으로 올라가는 비탈진 자갈길은 아직 그대로 있다. 마치 구원으로 통하는 길 같아 사람들이 미어지게 올라갔다 한다. 그 길을 보면서 환각 같은 것이 왔다. 만약 어느 날 갑자기 서울에 같은 일이 생기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아야 소피아에 못지않은 대형 교회들과 사찰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구원을 바라지 않을까. 6.25전쟁 때도 정부 말만 믿고 안심하고 있다가 사흘 만에 수도 서울에 인민군 탱크가 나타나 혼비백산한 경험들이 있다. 악몽이라 해도 너무 끔찍해 애써 지웠다. 그러다가 얼마 전 북한의 핵실험 소식을 듣고 다시 떠올랐다. 처음엔 많이들 놀랐다가 이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옛날로 돌아간 것 같다. 정쟁과 폭력시위는 여전하고 정부는 안심하라 한다. 주변국들에 비해 정작 핵폭탄을 이고 있는 한국은 태연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기이한 평화가 생각났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독일과 대치한 서부전선은 평온했다. 독일은 허약한 서부전선을 감추기 위해 일체의 적대행위를 하지 않았고 프랑스도 공격하지 않았다. 양쪽은 서로 대치하면서 축구 구경도 하고 크리스마스 땐 선물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동안 프랑스와 독일 사이엔 평화 무드가 드높아 전쟁을 주저했던 것이다.

몇 년 전부터 화해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양국은 1차 대전의 격전지 베르됭에서 화려한 화합의 모임을 갖기도 했다. 매스컴에서도 히틀러가 화해를 바란다는 회견기를 크게 실어 평화애호가로서의 좋은 인상을 심어놓았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독일민족의 적 프랑스를 파멸시키겠다던 장담을 잊었던 것이다. 평화 무드에 오래 젖다 보니 설마 독일이 쳐들어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프랑스 정부는 세계 최강의 육군과 난공불락의 마지노선 요새가 있으니 안심하라고 했다. 독일은 한 달 만에 폴란드 전쟁을 끝내고 프랑스 침략을 준비했다. 독일이 서부전선을 공격한 것은 대전 발발 8개월 뒤다. 그때까지 양국 간엔 기묘한 평화가 계속됐던 것이다.

서부전선에서 개전한 지 2주 뒤엔 프랑스군 주력이 괴멸하고 한 달 뒤엔 파리가 함락되었다. 프랑스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동안 독일은 시간을 벌어 신무기와 전격전을 개발했던 것이다. 개전 한 달 만에 독일군이 파리에서 개선 행진하는 모습을 보고 프랑스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로부터 4년간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기까지 프랑스 국민은 나치독일 치하에서 죽을 고생을 했다. 21세기 대명천지엔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가끔 악몽을 꾸는 것은 세월 탓일까, 나이 탓일까.

최우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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