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병으로 머리 쳤는데 "정당방위", 밀었는데 "폭행"…기준 뭐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인색한 정당방위 기준 논란

당신의 법정

‘묻지마 난동’이 횡행하는 흉흉한 시기에 ‘정당방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싸움 나면 맞는 게 이기는 거다”라는 말도 있지만, 그냥 맞는 정도가 아닌 상황에선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소주병으로 머리를 쳤는데 ‘정당방위’가 인정된 경우가 있는가 하면, 가위를 들고 위협한 상대를 넘어뜨렸는데 ‘상해죄’로 벌금을 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차이가 뭘까요?

최근 흉기 난동 사건이 불러일으킨 다면적 공포는 정당방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법원은 폭력에 맞선 폭력을 정당방위로 인정하는 데 인색한 태도를 보여왔다. 한 판사는 정당방위라는 위법성 조각사유 인정에 인색한 법원의 관행이 문제라고 판결문에 쓰기도 했다.

형법에 나오는 정당방위의 정의는 이렇다. ‘현재의 부당한 침해로부터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을 방위하기 위해 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 벌하지 아니한다.’ 법 조문만 봐선 어떤 상황에서, 어느 정도 방어를 하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 식당에서 다른 테이블 일행과 시비가 붙었는데 상대방이 고기 자르던 가위를 들고 다가와 삿대질을 하더니 다리를 발로 가격했다. 이에 A씨는 상대방을 발로 차고, 상대방이 넘어진 후 일어나려는 걸 다시 넘어뜨렸다.

◦ 주점에서 술을 마시다 담배를 피우러 나온 B씨. 할아버지가 와서 “담배 피우지 말라”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실랑이하다 B씨가 지팡이를 밀쳐 할아버지가 넘어졌고 허벅지 뼈가 부러져 전치 12주가 나왔다.

◦ 전 여자친구가 두 명의 남성을 고용해 집으로 찾아왔다. 그녀는 뺨을 때리고 골프채까지 휘둘렀다. C씨는 양손으로 두 남성의 멱살을 잡아 지하주차장으로 데려갔다. 한 명은 도망갔으나 도망가지 못한 남성은 C씨에게 많이 맞았다.

A·B·C씨는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모두 인정되지 않았다. ‘가위 사건’에서 울산지법은 “A씨의 행위는 소극적 방어를 넘어서는 것이고 다른 수단과 방법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

‘지팡이 사건’에서 서울중앙지법은 B씨의 행위가 “서로 공격할 의사로 싸우다가 먼저 공격을 받고 이에 대항하여 가해하게 된 것”이라며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골프채 사건’에서 평택지원은 C씨가 “상황이 종료된 후”에도 두 남성을 폭행한 건 정당하지 않다고 봤다. 종합하면, 정당방위는 (A)달리 방법이 없을 때 (B)서로 싸우는 게 아니라 방어만 해야 하고 (C)위험한 상황이 종료되면 멈춰야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먼저 때렸어요”라며 “상대방은 부당 침해, 나는 정당방위”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 “쌍방폭행이야”로 결론이 난다.

반면에 ‘방어&공격’이 아닌 ‘방어 ONLY’로 인정된 경우는 이렇다.

◦ 경비원끼리 시비가 붙었는데, 상대방이 분리수거용 커터칼을 휘두르자 그를 걷어찬 사건으로, 지난해 6월 여주지원에서 무죄 선고.

◦ 교도소 내에서 20대 수용자가 눈 부위를 때리자 60대 수용자가 손톱으로 얼굴을 긁은 사건으로, 지난 5월 전주지법에서 무죄 선고.

◦ 노상에서 담배를 피우던 중 행인이 얼굴에 침을 뱉고 가 사과를 요구했으나 그냥 가려 하자 뒷덜미를 잡고 분수대로 데려가 눌러 앉힌 사건으로, 지난해 5월 대전지법에서 무죄 선고.

‘면책적 과잉방위’란 개념도 있다. 방어가 좀 과했더라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공포·경악·흥분·당황해 그런 거라면 처벌하지 않는 걸 말한다. 술을 마신 남성이 소주병을 들고 와 성기에 집어넣겠다며 하의를 벗기자 소주병을 빼앗아 세 차례 머리를 때린 여성에 대해 법원은 정당방위를 인정했다. 인천지법은 “남성에 비해 힘이 약하고, 잠에서 막 깨 대처 방법을 이성적으로 강구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소주병으로 그를 때리는 방법 외에 다른 적절한 방법을 찾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정당방위 또는 면책적 과잉방위가 인정된 사례를 소개했지만 실제론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김병수 부산대 교수는 9년 전 논문(‘정당방위의 확대와 대처방안’, 『형사정책연구』)에서 “1953년 형법 제정 이후 60여 년 동안 대법원이 정당방위를 인정한 사례는 14건에 불과하며, 법원은 정당방위를 원칙적으로 부정한다”고 꼬집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