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 1도 오르니 성폭력 6% 늘었다"…극한기후 섬뜩한 경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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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데스밸리 국립공원을 지나는 차량 옆에 폭염으로 인한 극한 열기를 주의하라는 경고 팻말이 놓여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1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데스밸리 국립공원을 지나는 차량 옆에 폭염으로 인한 극한 열기를 주의하라는 경고 팻말이 놓여있다. AFP=연합뉴스

폭염과 폭우, 가뭄과 홍수를 오가는 극한 기후가 전 세계를 위협하는 가운데, 극단적인 이상 기후가 인명, 재산 피해를 야기할 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범죄와 폭력 행위를 부추기고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극심한 더위가 인간의 공격성·폭력성을 자극하고, 홍수·가뭄 등 재난에 의한 빈곤 등이 여성·어린이를 가정 폭력,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시킨다는 지적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은 지난해 발표한 '폭염과 정신건강' 보고서에서 "기후 변화가 2090년까지 전 세계 모든 범죄율을 최대 5% 증가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 10여 년간 미국·유럽 학계에선 WEF 보고서처럼 날씨와 폭력, 범죄 상관관계를 분석한 연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미국에선 총기 범죄와 기온과의 연관성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 총기폭력기록보관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미국 전역에서 발생한 총기 관련 범죄 356건 중 4분의 1이 폭염이 덮친 6~7월에 몰려있었다. 지난 2021년 미국 공공경제 저널에 실린 기온과 로스앤젤레스(LA) 총기 사건 관련 연구도 기온이 35도 이상일 때 총기 범죄율이 15~21도일 때보다 12% 늘었다고 밝혔다.

18일(현지시간) 이탈리아 수도 로마의 포폴로 광장에서 한 사람이 분수대에 머리를 담그며 더위를 식히고 있다. 이날 로마의 최고 기온은 41.8도로, 그 동안 로마에서 관측된 기온 가운데 가장 높은 기록이다. 로이터=연합뉴스

18일(현지시간) 이탈리아 수도 로마의 포폴로 광장에서 한 사람이 분수대에 머리를 담그며 더위를 식히고 있다. 이날 로마의 최고 기온은 41.8도로, 그 동안 로마에서 관측된 기온 가운데 가장 높은 기록이다. 로이터=연합뉴스

"기온 1도 오르면 성폭력 6% 증가" 연구도

유럽에서도 날씨와 범죄 사이엔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스페인 마드리드 소재 IPV(부부·연인 간 친밀한 관계 폭력) 신고센터에 2008년부터 2016년까지 접수된 내역을 분석한 결과 35도가 넘는 폭염 후 3일 뒤 신고 건수가 그렇지 않은 날보다 2배 늘었다. 그리스에서도 2018년 한해 동안 발생한 총 137건의 살인 사건 중 30% 이상이 평균 기온이 25도 이상인 날에 발생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영국 런던 경찰청이 2010년 4월부터 2018년 6월까지 접수된 범죄 신고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기온이 10도 이하일 때보다 기온이 20도 이상일 때 폭력 범죄가 평균 14%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미국의학협회 학술지 '정신의학'에 게재된 논문은 기온과 성폭력 간의 상관관계를 짚었다. 연구팀이 2010년부터 2018년까지 인도, 파키스탄, 네팔 등 남아시아 3개국 15∼49세 여성 19만4871명이 겪은 가정 폭력과 이 기간 기상 상황을 비교 분석한 결과 평균 기온이 1도 오르면 성폭력이 6%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학계에서 발표된 관련 연구물 130건을 분석한 미 컬럼비아대 공중보건학 연구팀은 "극한 기상 상황과 폭력 증가의 연관성이 압도적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더위가 사람을 괴물로"…열에 취약한 뇌

기후 변화가 폭력, 범죄 증가로 이어지는 원인으로 의학계에선 세로토닌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에 주목한다. 학술지 네이처의 자매지인 사이언티픽 리포트 등에 따르면 세로토닌은 인간의 공격적 성향을 제어하는 데, 고온에 취약한 편이다. 극한 더위 탓에 세로토닌이 결핍되면 아드레날린·엔도르핀과 같은 호르몬 분비를 제대로 조절하기 어렵고, 이에 따라 폭력성과 공격성이 증가한다는 설명이다.

복잡한 문제를 인지하고 이를 해결하는 인간의 뇌가 이른바 '열(heat) 스트레스'에 의해 손상되기 쉽다는 점도 지적된다. 미 하버드대 보건대학원 연구팀은 보스턴에 거주하는 학생 43명에 실험 연구를 진행했다. 폭염 기간 에어컨이 없는 방에 장시간 있던 학생들이 인지 테스트에서 다른 학생들보다 13% 더 나쁜 성적을 얻고 전반적인 반응 속도도 느렸다. 미 아이오와 주립대 심리학과 연구진은 저서『기후 변화와 인간 행동』에서 "고온으로 인해 뇌를 식히기 위해 인간은 신체의 다른 부분으로 자원을 전환하게 된다. 이럴 경우 뇌가 새 정보를 처리하고 감정을 관리하며 충동을 제어하기 어려워진다"고 설명했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사회 약자일수록 '기후 범죄'에 더 취약

사회구조적 면에서 접근하는 설명도 나오고 있다. 홍수·가뭄과 같은 기후 재해로 경제가 어려워지고 사회가 혼란할 때 여성·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는 폭력과 범죄에 노출될 위험이 커진다. 특히 네팔·방글라데시·인도·파키스탄처럼 경제와 소득이 기후에 좌우되는 농업에 토대를 둔 나라에선 날씨 탓에 생계가 곤란해질 때 '화풀이 대상'이 여성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올초 45년 만에 최악으로 꼽히는 대홍수가 발생했던 인도 북부 비하르 지역에 사는 데비(40·가명)는 워싱턴포스트(WP)에 폭우가 쏟아지는 몬순(우기) 때마다 "남편이 두렵다"고 말했다. 일 년 대부분을 농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지내던 남편은 폭우로 일감이 없어지면 집으로 온다. 경제적 압박으로 인한 무력감에 시달리던 남편은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곤 한다.

국제아동구호 NGO 세이브더칠드런에 따르면 이들 남아시아 국가에선 여성과 미성년 소녀들은 농업 노동력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식량 생산의 60~80%를 책임진다. 기후 변화로 극한 가뭄에 시달리면 이들은 먼 곳에 있는 강, 우물 등에서 물을 길어오도록 강요받는다. 마을과 멀리 떨어진 숲 등을 오고가는 과정에서 범죄 집단의 표적이 되거나 성폭행을 당하는 일이 늘어난다.

이를 두고 국제 구호단체 케어 인터내셔널은 "기후변화로 '이중 불평등(double injustice)’을 겪고 있는 셈"이라 지적했다. 니트야 라오 영국 이스트앵글리아대 교수는 WP에 "기후변화가 실제 어떤 사회문제를 악화시키는지 그 연결 고리, 증거를 최대한 촘촘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지난 16일(현지시간) 인도 북동부 아삼 주 모리가온 지역에서 홍수가 나 무릎 위까지 물이 찬 가운데 한 여성이 힘겹게 걸어가고 있다. 신화통신

지난 16일(현지시간) 인도 북동부 아삼 주 모리가온 지역에서 홍수가 나 무릎 위까지 물이 찬 가운데 한 여성이 힘겹게 걸어가고 있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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