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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비명에 아빠 달려갔지만…토사가 덮쳐 부녀 함께 참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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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경북지역 잇따른 산사태

산사태가 발생한 예천군에서 한 구조대원이 수색견을 동원해 실종자를 수색하는 모습. [뉴시스]

산사태가 발생한 예천군에서 한 구조대원이 수색견을 동원해 실종자를 수색하는 모습. [뉴시스]

“산에서 쓰나미가 밀려오는 줄 알았다니까. 집이고 차고 통째로 그냥 휩쓸려서 떠내려가더라고. 저기 아랫집에는 김씨랑 아들이랑 자고 있었는데, 아들만 겨우 찾았대.”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 주민 김익겸(68)씨는 지난 15일 새벽 산사태 당시 본 풍경을 ‘쓰나미’ ‘전쟁터’ 등으로 묘사했다. 예천군에서는 지난 13일부터 계속된 폭우로 16일 오후 6시 기준 9명이 사망하고, 8명이 실종 상태다. 지인의 농사를 도우려 주말에 벌방리를 찾은 한모(62)씨도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는 빗줄기가 갈수록 거세지자 차량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다 차와 함께 산사태에 휩쓸렸다. 그는 “차 안에 물이 허리까지 차올랐다. 이대로 그냥 죽는구나 했는데, 차 뒤쪽에 구멍 같은 게 보여 겨우 빠져나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날 오후 3시45분쯤엔 예천군 효자면 백석리에서 수색 작업 중 매몰돼 있던 A씨(67)의 시신이 발견됐다. A씨는 한 종합편성채널 인기 프로그램인 ‘나는 자연인이다’에 출연했던 장모씨의 아내인 것으로 파악됐다. 산사태에 집이 휩쓸리며 아내와 함께 실종된 장씨의 생사는 이날 오후 9시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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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애가 비명을 지르니까 사촌 형님이 구하러 갔다가 그만 둘 다….”

같은 날 오전 경북 영주시 영주기독병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김모(54)씨는 이렇게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씨는 전날 오전 7시27분쯤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에서 발생한 산사태로 주택이 매몰되면서 숨진 김모(67)씨의 사촌 동생이다. 집에 있던 첫째 딸(25)도 아빠와 함께 변을 당했다. 엄마 정모(58)씨만 가까스로 소방 당국에 의해 구조돼 치료 중이다. 사촌 동생 김씨는 “형수(정씨) 말로는, 형님이 딸을 구하려 했는데 순식간에 토사에 휩쓸렸다”고 했다.

계속된 집중호우로 산사태가 발생한 경북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 마을이 16일 오전 처참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연합뉴스]

계속된 집중호우로 산사태가 발생한 경북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 마을이 16일 오전 처참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연합뉴스]

사흘 넘게 폭우가 이어진 경북에선 16일 오후 6시 기준 19명이 사망하고 8명이 실종됐다. 경북 재난안전대책본부(본부)에 따르면 사망자 중 16명이 산사태에 직접 휩쓸리거나 집이 매몰·침수돼 변을 당했다. 산사태 피해가 발생한 지자체의 공무원들과 주민들 사이에선 “예상치 못한 일이다. 당혹스럽다”는 반응이 많았다. 경북엔 산지가 많아 산사태 위험이야 어느 정도 예견하긴 했지만, 짐작한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비가 장시간 쏟아진 탓에 피해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민들 사이에선 10년 전쯤부터 산지를 대규모로 개간해 사과밭 등으로 바꾼 것을 산사태의 원인으로 지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예천이 고향인 70대 김모씨는 “말 그대로 무분별한 개간이 이뤄졌다”며 “수십 년 자란 나무를 뽑고 사과나무 심는데 산사태가 안 나겠나”라고 주장했다. 삼가리 부녀를 덮친 산사태 역시 무분별한 개간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남부지방산림청 관계자는 “삼가리 마을 뒷산 4개 필지에서 토사가 쏟아진 것으로 보이는데, 대부분 나무가 안 심어져 있었다”고 했다. ‘국립공원관리구역’으로 지정된 이 필지는 3년 전 땅 주인이 공원 관리청과 사전 협의 없이 무단 형질 변경하는 과정에서 나무를 대거 베어낸 것으로 드러났다.

토사가 마을을 덮쳐 5가구가 매몰된 백석리도 마찬가지다. 산사태 연구 분야 권위자인 이수곤 전 서울시립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백석리 현장 사진을 보고 “10년 전 위성사진과 비교했을 때 산 전체에 도로와 농지를 위한 전반적인 개간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런 공사 뒤엔 토양 자체가 약해지고 지형이 가팔라지는 등 산사태 위험이 커진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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