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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결혼, 두 번의 처복…두 여인이 김대중을 만들었다"-김대중 육성 회고록〈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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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대중 육성 회고록 〈9〉

내 삶에는 두 여인의 향기가 서려 있다. 내 운명의 연인(戀人)에 관해 이야기하련다.

1959년 8월 나의 첫 여인이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궁핍한 생활고에 시달리던 아내 차용애가 아들 둘(홍일·홍업)을 남긴 채 32세 나이로 요절(夭折)했다. 그녀를 본 첫날을 잊을 수 없다.

나는 목포공립상업학교(목상)를 졸업한 뒤 해방 직전인 44년 전남기선㈜이란 해운회사에 취직해 회계 서무를 맡았다. 그해 여름, 사무실 앞에 앉아 길거리를 내다보다 한 여성에게 눈길이 꽂혔다. 하얀 원피스 차림에 양산을 받쳐 든 젊은 여성이 눈부셨다. 하얀 피부에 머리는 단정히 빗어 넘겼다. 우중충한 항구도시 목포에서 그렇게 세련되고 아름다운 여성은 처음 봤다.

첫눈에 반한 첫 아내 차용애

첫부인 차용애 여사와 장남 김홍일 전 의원(오른쪽, 15~17대 의원), 차남 김홍업 현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왼쪽, 17대 의원).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첫부인 차용애 여사와 장남 김홍일 전 의원(오른쪽, 15~17대 의원), 차남 김홍업 현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왼쪽, 17대 의원).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첫눈에 반했다. 스무 살의 청춘 김대중은 상사병이라도 걸린 듯 그녀의 자태를 머리에서 떨쳐낼 수 없었다. 그녀의 신상을 수소문했다. ‘차용애’라는 이름을 가진, 목상 동기동창의 누이동생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일본에서 여학교를 다니다 일본 본토에 미군의 폭격이 심해지자 얼마 전 귀국했다고 한다.

친구의 여동생이라니, 인연이었다. 친구 핑계를 대고 그 집에 자주 놀러 갔다. 자연스럽게 그녀와 말문을 트고, 극장도 같이 가면서 가까워졌다. 우리는 애틋한 감정을 고백하고, 장래를 약속하는 사이가 됐다.

그런데 그녀의 부친이 우리 결혼에 반대했다. 내가 징집돼 일본의 전쟁터에 끌려가 죽어버리면 딸이 과부로 살아야 한다고 걱정했다. 당시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은 젊은이들을 징집해 전선으로 내몰았다. 전쟁이 길어지면 나도 언젠가는 징집당할 처지였다.

“대중씨에 시집 못 가면 죽겠다”

어느 날 용애 모친이 집으로 나를 불렀다. 그녀의 부친, 내 친구, 용애가 있는 자리에서 “오늘 담판을 짓자”고 했다.

용애 부친: “네가 당사자이니 어떻게 할 건지 결정해라.”

용애: “저는 대중씨에게 시집 못 가면 죽어 버리겠어요.”

이듬해 4월, 21살 신랑과 18살 신부는 결혼식을 올렸다. 세 달 뒤인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를 선언했다. 아내와 나는 “만세”를 외쳤다. 식민지 해방과 함께 징병 공포에서 벗어난 우리 부부는 백년해로를 꿈꿨다.

나는 목포에서 해운과 조선 사업을 하며 꽤 성공했다. 바다와 배를 통해 부자가 되고자 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임시 수도 부산에 돈과 사람이 모였다. 사업 확장을 위해 기반을 목포에서 부산으로 옮겼다.

부산은 내게 넓은 세상에 눈을 뜨게 했다. 부산 영도에 머물던 죽산 조봉암(1898~1959)을 찾았고, 김정례(1927~2020, 보건사회부 장관 역임)·강영훈(1922~2016, 국무총리 역임)씨 등과 교류하며 시국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피란지 부산에서 만난 이희호

1962년 5월 10일 이희호 여사와의 결혼식 장면. 서울 체부동에 있는 이 여사의 외삼촌 집에서 열렸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1962년 5월 10일 이희호 여사와의 결혼식 장면. 서울 체부동에 있는 이 여사의 외삼촌 집에서 열렸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면우회(勉友會)’라는 모임에 우연히 참석했다. 원래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모여 ‘면학동우회’로 처음 시작했던 모임이 피란지에서 면우회로 이름을 바꾸고 문을 넓혔다. 나는 정식 회원은 아니었지만, 그들과 어울려 인생과 나라의 내일에 관한 토론을 즐겼다.

면우회에서 ‘이희호’라는 젊은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전시 중 군경원호 사업을 하던 ‘대한여자청년단’에서 활동 중이었다. 전쟁통이라 군복을 염색한 점퍼를 입었지만 고상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는 이상하리만치 잘 통했다. 다방에서 만나고 산책을 하며 종종 어울렸다. 그녀는 전쟁이 끝나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다 기약 없이 헤어졌다.

세 번 낙선에 집안 ‘거덜’

앞서 얘기했듯이(육성 회고록 4회), 나는 이승만 대통령이 집권 연장을 위해 발췌(拔萃) 개헌안을 강행한 ‘부산 정치 파동’(52년)을 목도한 뒤 정치 투신을 결심했다. 54년 29세의 나이로 목포에서 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해 첫 고배를 마셨다. 본격적으로 정치를 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58년, 59년 야당 후보로 강원도 인제에서 출마했지만 두 번 모두 쓴잔을 삼켰다.

당시만 해도 선거는 곧 돈이었다. 한 번 출마해도 기둥뿌리가 뽑히는 게 선거였다. 세 번 내리 선거를 치렀더니 집안이 거덜났다. 아내는 미장원을 하면서 살림을 챙겼다. 가게가 빚으로 넘어가자 집에서 손님을 받는 사설 미장원까지 하며 남편 뒷바라지를 했다. 서울에서 집을 여덟 번이나 옮겨다녔다.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에 찌들던 59년 8월의 어느 날, 아내가 내 곁을 떠났다.

첫 아내와의 허망한 이별

아내는 자주 가슴앓이를 했다. 그날도 가슴앓이가 심해 다량의 약을 먹고 혼수상태에 빠지더니 손쓸 틈도 없이 가버렸다. 허망한 작별이었다. 남편이 정계 진출에 실패하자 고된 삶에 지쳐 비관 끝에 목숨을 스스로 버렸다는 소문이 동네에 돌았다. 주변이 수군덕거릴 만큼 아내의 아픔과 상처는 깊었다.

용애를 사랑했다. 아내는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대중씨가 아니면 죽어 버리겠다”며 내게 다가왔다. 백년해로는커녕 14년 만에 사별했다. 정치를 한답시고 재산을 탕진해도 싫은 소리 하지 않고 묵묵히 남편을 믿었던 아내였다. 내가 좌절하지 않은 힘의 원천이었다. 사무치는 그리움과 미안함에 통곡하며 그녀를 먼 곳으로 배웅했다. 나는 용애에 대한 추모의 정을 평생 가슴에 간직하고 살았다.

8년 만에 이희호와 조우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아내를 잃고 방황하던 그 시절, 또 다른 운명과 조우했다. 피란 시절 부산에서 만났던 이희호를 서울 종로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쳤다. 8년이 지났건만 서로 호감을 가졌던 우리는 상대를 또렷이 기억했다. 그녀는 전쟁이 끝난 후 미국에 4년간 유학을 다녀와 대한YWCA 전국연합회 총무로 일하고 있었다. 다방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다 또 기약도 없이 헤어졌다.

60년 4·19 혁명과 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나는 61년 5월 인제 재·보궐 선거에서 민의원(民議院)에 당선됐다. 4전 5기 끝에 첫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불과 사흘 뒤 5·16 쿠데타가 터지고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의사당 구경도 못 한 채 정치 낭인의 신세로 되돌아가는 불운을 겪었다.

나는 무일푼의 백수였다. 버스비가 없어 쩔쩔맬 정도로 곤궁했고, ‘정치 활동 금지자’로 묶여 처량하고 고단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 명동의 YWCA 연합회로 이희호를 무작정 찾아 나섰다. 서로 마음이 맞았던지 만남이 잦아졌다. 돈에 쪼들리던 나는 밥값 등 주로 얻어먹었다. 쿠데타 직후였기에 우리의 대화는 정치 이야기가 많았다. 연인이면서 동지로서의 유대감을 느꼈다.

나는 결혼 얘기를 꺼낼 염치가 없었다. 가난한 홀아비인 데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다. 그런 나를 그녀는 이해하고, 따뜻한 말로 격려하며 결혼 분위기를 이끌었다. 용기를 냈다. 62년 3월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이희호의 손을 잡고 청혼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지만 원대한 목표는 있습니다.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당신이 필요합니다.”

가족, 친지, 여성계 결혼 반대

그녀는 나를 받아들였다. 뜻밖의 걸림돌에 부딪혔다. YWCA 등 그녀 주변에서 깜짝 놀라며 반대했다. 가족은 물론이고 친지, 직장, 여성계 선후배들이 들고일어났다. 우리 두 사람의 경제·사회적 조건이 너무도 맞지 않았으니 뜯어말린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이희호는 6남 2녀 중 장녀였다. 아버지는 세브란스 의전을 나온 유명한 의사였고, 형제들도 성공한 잘나가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이화여전과 서울사대를 다니고 미국에서 유학까지 한 그녀는 미래가 보장된 신세대 여성 지도자였다.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청혼 두 달 뒤인 5월 식을 올렸다. 예물 반지 두 개도 그녀가 마련했다. 결혼 당시 내 나이는 38세, 그녀는 40세였다.

“잘 생겼잖아요”

그녀는 두 자식이 딸린 빈털터리인 나를 선택했다. 그리고 국회의원, 망명, 피랍, 연금과 투옥, 대통령에 이르는 파란의 여정 속에서 영광과 고난의 시간들을 함께 헤쳐 나갔다.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단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었다고 그녀는 훗날 술회했다.

지인들이 ‘왜 김대중과 결혼했느냐’는 장난기 섞인 질문에 “잘 생겼잖아요”라고 화답하는 재치 있는 여인이었다. 내가 영원히 잠드는 날 이후에도 그녀는 인생의 동반자이자 동지로서 내 곁에 남을 것이다.

차용애와 이희호, 두 여인은 불굴의 정치인 김대중을 만들었다. 나를 향한 지고한 사랑과 헌신에 고개를 숙이며 솔직하게 말한다. “두 번 결혼했지만 두 번 다 처복(妻福)이 있었다.”

연재 중인 김대중 육성 회고록 전문(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66700)더중앙플러스(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158)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10회 〈긴급조치 세대와 10·26〉이 7월 18일 이어집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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