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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와 사색]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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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7호 30면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강성은

잠든 사이 붉은 가로등이 켜졌다
붉은 가로등이 켜지는 사이 달에 눈이 내렸다
달에 눈이 내리는 사이 까마귀가 울었다
까마귀가 우는 사이 내 몸의 가지들은 몸속으로만 뻗어갔다
몸속에 가지들이 자라는 사이 말〔言〕들은 썩어 버려졌다
말들이 썩어 버려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구두를 신는 사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여름이 오는 사이 도시의 모든 지붕들이 날아갔다
도시의 지붕들이 날아가는 사이 길들도 사라졌다
길들이 사라지는 사이 지붕을 찾으러 떠났던 사람들은 집을 잃었다
그사이 빛나던 여름이 죽었다
여름이 죽는 사이 내 몸속에선 검은 꽃들이 피어났다
검은 꽃이 피는 사이 나는 흰 구름을 읽었다
흰 구름을 읽는 사이 투명한 얼음의 냄새가 번져갔다
얼음 냄새가 번지는 사이 나는 구두 위에 구두를 또 신었다
열두 켤레의 구두를 더 신는 사이 계절은 바뀌지 않았다
구두의 계절이 계속되는 사이
나는 구두의 수를 세지 않았다
구두 속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창비 2009)

세상 모든 것에 ‘사이’가 있습니다. 먼저 시간이 그렇습니다. 새벽과 아침과 한낮과 저녁과 밤, 그리고 절기와 계절. 아무리 촘촘하게 눈금을 그어도 이 사이를 메울 수 없습니다. 공간도 그렇습니다. 이편과 저편, 혹은 내가 딛고 있는 곳과 닿고자 하는 곳. 이 사이를 좁힐 방법도 요원합니다. 또 사람과 사람이 그렇습니다. 인연과 관계라는 사이. 잡고 잡히고 놓고 놓치고. 더 가까워지고 싶은 사이가 있는 반면 모르는 편이 더 좋았을 먼 사이도 있습니다. 이 사이에서 우리는 종종 발이 빠집니다. 자주 길을 잃습니다. 물론 그러다가도 새로운 사잇길을 만들어냅니다. 부디 숱한 사이들과 내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합니다.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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