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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서울대 응급실로 갑시다"…환자들 택시가 된 구급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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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서울 광진구 혜민병원 응급실. '지역응급의료기관'이라는 글씨가 써진 간판에 불이 켜져 있다. 채혜선 기자

서울 광진구 혜민병원 응급실. '지역응급의료기관'이라는 글씨가 써진 간판에 불이 켜져 있다. 채혜선 기자

지난달 12일 오후 9시 서울 광진구 혜민병원 응급실. 대기실이 텅텅 비어있다. 근처 수납창구에는 환자 가족 2명이 진료비를 내고 있다. 응급실을 나서던 50대 남성은 “접수하자마자 진료받았고, 금방 끝났다”고 말했다. 이후 40분 동안 구급차가 오지 않았고, 직접 오는 환자도 없었다. 응급실 직원은 “주민들이 우리 병원에 응급실이 있는지조차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환자는 50명. 시간당 2명꼴이다. 김병관 원장은 “우리 병원은 굉장히 한가한 편이다. 꾸준히 경증환자가 오며 대체로 병상에 여유가 있다"고 말했다.

“언제 진료 볼 수 있는 거예요.”

비슷한 시각,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건국대병원 응급실에선 이런 고성이 터졌다. 대기환자 20여명이 의료진을 닦달했다. 바삐 오가던 간호사는 “기다려달라”고 사정했다. 접수창구에도 10여명의 환자가 있다. 한 시간 기다린 70대 A씨는 “세 살배기 손자가 손목을 접질렸다. 빨리 봐 달라”고 졸랐다. A씨 손자 정도의 질환이면 혜민병원 가면 바로 진료받는데, 왜 대학병원을 고집할까.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응급의료기관은 지역응급기관(1차, 238개)-지역응급센터(2차,128개)-권역응급센터(3차, 38개)로 돼 있다. 중증도에 따라 나눠 맡게 돼 있다. 하지만 이런 체계가 무너진 지 오래다. 서울의 K대학 권역응급센터장은 “환자들은 본인이 다 중증이라고 생각하고 큰 병원으로 몰리지만, 실제 10~20%만 중증”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은 혜민병원 같은 1차 응급실이나 2차에서 커버할 수 있다는 얘기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강남세브 -20’ ‘서울성모 -22’ ‘서울아산 -34’ ‘삼성서울 -7’….

지난달 16일 오후 3시 119 구급대원의 ‘119 응급의료자원정보’에 이렇게 떴다. 마이너스(-)는 ‘환자 대기'를 의미한다. 당시 서울 강남권역 병원 5곳은 환자를 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경증·비응급 환자는 그리로 간다. 2년 차 구급대원 이형권(가명·30대)씨는 “작은 데로 이송하려 하면 환자의 90% 이상이 거부한다. 환자 말대로 안 하면 민원이 생긴다”라고 말했다. 김병근 평택 박애병원장은 “대학병원 응급실에는 전공의가 상주하지만 지역 중소병원 응급실은 전문의가 상주하는데도 환자가 안 온다”고 말했다.

119구조·구급 법률에는 병원 선택권은 구급대원에게 있다고 돼 있지만 사문화됐다. 이제는 구급차가 택시 신세로 전락했다. 1급 응급구조사 B(40대)씨는 "경기도 분당에서 복통환자를 이송하려는데 환자가 '분당서울대 갑시다'라고 했다. 증상을 평가한 후 '제생병원 가시죠'라고 해도 안 들었다"고 말했다. 30대 구급대원 홍모(여)씨는 “택시를 부른 것처럼 손짓하는 환자가 많다”라고 말했다. 때로는 '환자 선택대로 이송했다. 상태 변화가 있더라도 민원을 걸지 않겠다'는 환자 서명을 받는다.

전문병원 응급실도 한가하다. 복지부 지정 뇌혈관전문병원인 명지성모병원(1차 응급, 서울 영등포구) 허준 의무원장은 "우리는 신경외과 등의 전문의 4명이 365일 항상 준비돼 있지만 환자가 안 온다. 큰 병원 열 군데 돌다가 온다. 이미 골든타임을 놓치고 온다"고 하소연했다. 복지부 지정 심장전문병원인 부천세종병원(2차 응급, 경기도 부천) 박진식 이사장도 "우리는 환자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증 환자 비율이 높은 편"이라며 “지역 병원들은 환자가 안 오니 의료진을 배치하지 못하고, 환자는 더 오지 않는 악순환에 빠진다”라고 말했다.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응급실 뺑뺑이의 또 다른 원인은 서울과 경기의 벽이다. 경기도 구급대원은 아예 서울 병원에 가려 시도하지 않는다. 잘 받아주지 않아서다. 지난 5월 말 숨진 용인 70대 중증외상환자를 이송한 구급대는 경기·강원·충청·인천 13개 병원에 연락했다. 서울 고대구로병원 등 가까운 권역외상센터가 있는데도 안 했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 관계자는 “서울의 병원들이 ‘경기도에 병원이 많은데 왜 서울로 오느냐’는 식으로 나온다. 오죽하면 원주에 연락하겠느냐”라고 말했다.

문영수 적십자병원장은 “중환자가 아닌 사람은 큰 병원이 책임지고 근처 병원(1,2차 응급실)로 전원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김병근 원장은 “자기 차나 걸어서 상급종합병원 응급실로 가는 건 안 된다. (119 구급대 등의) 병원 결정권을 보장하고, 그 책임을 묻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운 순천향대부천병원 응급센터장은 “자기 발로 오는 사람은 작은 병·의원을 거쳐 진료를 받고 오게 하든지, 야간이나 주말이라면 소방이나 중앙전원조정센터 등에 먼저 연락해 증상 등을 얘기한 뒤 적절한 응급실에 가게 해야 한다”고 했다.

비응급환자가 권역응급센터에 가면 최대 7만6398원(진료비 별도)의 응급실 관리료 전액을 낸다. 2차 응급실은 최대 6만6904원이다. 부담이 크지 않다 보니 큰 데로 몰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강희동 강릉아산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장은 “서울이 붐빈다고 이사 오지 말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병원이 경증환자를 제한할 수 없다, 국민적 합의를 통해 경증환자의 큰 병원 응급 진료비용을 올리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석재 대한응급의학의사회 홍보이사는 "119 구급대원이 환자 중증도를 분류한 뒤 이송하되 중증 아닌 환자는 이송비를 부담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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