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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관 아니다" 공무원 떠넘기기, 그림자 아이 비극 키웠다 [현장에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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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난 2021년 경북 구미에서 방치돼 숨진 3세 여아의 친모 A씨 첫 재판날이 열리던 날 김천지원 정문 앞에서 시민들이 밥과 간식을 차려놓고 아이를 추모하고 있다. 뉴스1

지난 2021년 경북 구미에서 방치돼 숨진 3세 여아의 친모 A씨 첫 재판날이 열리던 날 김천지원 정문 앞에서 시민들이 밥과 간식을 차려놓고 아이를 추모하고 있다. 뉴스1

 본지는 감사원 발표 두달 여 전인 지난 4월초 출생미신고 아동(‘그림자 아동’)의 삶을 찾아나섰다. 그 과정은 저마다 “그림자 아동 관리는 소관업무 아니다”라는 공무원들 사이에서 ‘뺑뺑이’를 도는 일의 연속이었다. 주민등록은 행정안전부, 가족관계등록은 법무부, 위기아동 관리는 보건복지부, 출생신고 관리는 법원행정처, 출생신고 수리는 각 지방자치단체 등으로 책임과 기능이 나뉘어 있지만 모두가 신고 제도 밖의 아이들에 대해선 “책임이 없다”고 항변했다. 관리·보호가 될 리 만무한 상황임이 분명했다.

상황은 감사원의 복지부 정기감사 과정에서 드러난 미신고 영아 2명이 지난 21일 수원 장안구의 한 아파트 냉장고에서 주검으로 발견되면서 급변했다. 두 그림자 아동은 각각 4년 7개월, 3년 7개월 전 친모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감사원 요청에 따른 경찰의 수사 결과였다. 이튿날 감사원은 두 아이처럼 출생기록은 있지만 출생신고가 되지 않아 생존 여부를 알 수 없는 2015~2022년생 아이들이 2236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병원 밖에서 낳은 아이들 등은 제외된 불완전한 집계였지만 그림자 아동의 수에 대한 첫 공식 통계였다. 복지부는 그날 오후 5시 긴급 브리핑을 열고 전수조사 계획을 밝혔다. 지난 6년간 정부·국회에서 지지부진했던 ‘출생통보제’는 지난 23일 여야 원내대표가 모두 “통과시키겠다”고 나서며 급물살을 탔다.

2020년 11월 전남 여수에서 2년여 전 숨진 생후 2개월 남아가 냉장고에서 발견됐던 가정집 내부. 사진 여수시

2020년 11월 전남 여수에서 2년여 전 숨진 생후 2개월 남아가 냉장고에서 발견됐던 가정집 내부. 사진 여수시

 죽어서야 존재가 드러난 그림자 아동은 과거에도 많았다. 친부가 두 영아를 죽인 원주 삼남매 사건(2016·2019년), 여수 영아살해 후 냉동고 2년 방치 사건(2020년), 구미 3세 여아 학대살해 사건(2021년) 등이다. 감사원 관계자는 “‘복지를 사각지대 없이 잘 전달하는가’란 정부 본연의 역할에 초점을 맞춰 감사했다”며 “그림자 아동은 특별히 위험성이 높은 집단인데도 전혀 제도권 복지에 흡수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미신고 상태일수록 학대에 노출될 위험성이 크지만 주민등록번호가 없으면 학대 신고가 들어와도 국가아동학대정보시스템에 등록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사각지대를 줄일 방안은 지금도 있다. 이번 감사원 조사 방식처럼 병원이 신생아 예방접종 당시 부여한 임시신생아번호와 출생신고 기록을 대조하거나, 보호시설 등이 그림자 아동 수급을 위해 부여받은 사회복지전산관리번호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출생인구와 분만인구를 비교하는 방법도 있다. 지난해 1월만 봐도 행안부가 집계한 출생인구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기록된 신생아 분만 건수(사망 포함)보다 2551명 적었지만, 그간 정부는 이런 차이를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베이비박스 유기 등을 포함해 부모가 출생 한 달 내에 신고하지 않은 위기아동은 검사·지자체장이 직권 출생신고할 수 있다는 현행 제도(가족관계등록법 46조4항)도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 직권 출생신고는 서류를 완비해 제출하면 곧장 수리되지만, 관련 매뉴얼이 없어 담당자가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지난 2월 검사생활 10년 만에 처음 이 업무를 해봤다는 광주지검 홍민유 검사는 “법원에 사전 문의를 하고 갔는데도 지자체 공무원은 ‘검사가 신고할 수 있는 걸 처음 알았다’며 당황했다. 수사관이 여러 번 전화하고 방문한 끝에야 해결했다”고 말했다.

학교도 다녀보지 못했던 출생미신고 아동 전우주(19)군은 어릴 적 이부(異父) 4남매를 방치한 엄마와 치매를 앓는 외할머니, 자신을 차별하는 형이 집에서 소리지르며 몸싸움을 할 때마다 사진 속 작은 흰색 곰인형을 껴안고 방에 웅크려있었다고 했다. 사진 전우주군

학교도 다녀보지 못했던 출생미신고 아동 전우주(19)군은 어릴 적 이부(異父) 4남매를 방치한 엄마와 치매를 앓는 외할머니, 자신을 차별하는 형이 집에서 소리지르며 몸싸움을 할 때마다 사진 속 작은 흰색 곰인형을 껴안고 방에 웅크려있었다고 했다. 사진 전우주군

 취재 중 마주한 그림자 아동과 그 엄마 또는 아빠들은 대부분 복잡한 가정사나 빈곤, 지적 장애 등 말 못 할 곤란에 처해 있었다. 13년간 출생미신고 상태로 학교 한 번 다녀본 적 없는 19살 우주, 사망 3년이 지나서야 출생신고와 사망신고가 동시에 이뤄진 1살 다온이, 출산비용이 없던 엄마가 온라인을 통해 팔아넘겨 검사가 대신 이름을 지어준 2살 하늘이. 성폭행으로 임신한 2살 샛별이를 호적에 올리고 싶지 않아 자취를 감춘 친모 A씨, 집 떠난 남편과 감옥에 간 생부의 외면 속에 홀로 아들 하루의 출생신고에 고군분투한 아영씨, 친모의 거부로 아이가 9살이 될 때까지 출생신고를 못해준 미혼부 B씨….

최근 국회에선 의료기관에게 출생신고 의무를 부과하는 출생통보제와 함께 도입시 부작용에 대한 복안 성격으로 ‘익명출산제(보호출산제)’까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익명출산제는 찬반이 엇갈리면서 정치 공방으로 비화할 조짐마저 보이는 중이다. 그러나 또 다른 갈등을 조장하기에 앞서 출생미신고 상태로 살았던 생존자나 그들을 지켜온 한부모들을 꼭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길 여·야 의원들과 정부 관계자에게 권한다. 그들이 들려주는 사각지대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해야 학대와 죽음의 길을 빈틈없이 막을 수 있다.

한때 가수를 꿈꿨다는 우주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낙원’이다. “수많은 밤, 수많은 날 세상이 모르는 노랠 했어”라는 소절로 시작한다. ‘등록된 자’들의 관심이 그림자 아이들의 노래가 세상에 울려퍼질 그날을 열 수 있다.

그림자 아이들 : 존재할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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