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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혈사태 막아냈다"…리더십 치명상 입은 푸틴의 '정신승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의 무장 봉기가 종료된 지 이틀 만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첫 공식 메시지가 나왔다. 푸틴 대통령은 바그너그룹의 행동을 “반란”이라 규정하고 “이번 사태는 시작부터 종료까지 나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했다”며 자신의 리더십을 과시했다.

26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과 CNN·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이날 오후 푸틴 대통령이 대국민 TV 연설을 통해 “바그너그룹이 반란을 일으킨 뒤 36시간 동안 모든 위협에 대해 국가와 정부를 이끌고 있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NYT는 “예브게니 프리고진 바그너그룹 수장이 반란에 돌입한 뒤 러시아 대중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던 푸틴이 뒤늦게 국가의 정상성과 단합, 안정을 강조하고 나섰다”고 지적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대국민 TV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대국민 TV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BBC "독기 가득찬 짧은 연설"

이날 푸틴 대통령은 5분 여에 걸친 연설 내내 분노로 경직된 표정이었다. BBC 방송은 “독기로 가득 찬 짧은 연설”, NYT는 “(반란 지도자에 대한) 분명한 경멸”이라고 표현했다. 푸틴 대통령은 연설 내내 반란을 일으킨 프리고진의 이름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프리고진은) 러시아인끼리 서로 싸우는 동족상잔을 원했고, 국가와 국민 그리고 범죄(반란)에 연루된 사람들까지 모두를 배반했다”고 강도 높은 비판을 이어갔다.

반란 당시, 바그너그룹이 러시아 정규군의 별다른 저지 없이 모스크바에서 2㎞ 이내 지점까지 빠른 속도로 진군한 것에 대해 푸틴 대통령은 “대규모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조치를 취한 결과”라고 언급했다.

그는 “무장 반란은 어떤 경우든 진압됐을 것”이라며 자신이 상황을 완전히 장악한 덕분에 재앙을 면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김현서 디자이너

김현서 디자이너

이어 “(이번 반란은) 우크라이나의 네오 나치, 그들의 서방 후원자, 그리고 모든 국가 반역자가 원했던 것”이라며 반란 주동자들을 ‘분열 세력’으로 몰았다. 반면 자신을 전쟁 와중에 모든 위협에 대해 공동 전선을 제시하는 러시아 단합의 구심점으로 부각했다.

연설 내내 프리고진과 바그너그룹을 갈라치기하는 데도 주력했다. 바그너그룹 병사들에 대해 “애국자”라고 치하하면서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우들에 맞서도록 반란에 이용 당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멈춰 유혈 사태로 가는 선을 넘지 않았다”고 너그럽게 이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란에 가담한 바그너 병사들에 대해 안전 보장 약속을 재확인하며 “국방부와 계약을 하거나 집으로 가도 좋다. 아니면 벨라루스로 가도 된다”고 확언했다.

반면 이날 로이터통신은 “러시아 3대 국영 매체는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이 무장 반란 혐의 관련 수사를 계속 진행 중이며, 이는 앞서 공개된 면책 제안에 대한 명백한 반전”이라고 전하며, 반란 주동자에 대한 처벌을 예고했다. 앞서 크렘린궁은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한 바그너그룹과 협상 과정에서 프리고진에 대한 기소 취하를 약속한 바 있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국민들을 향해선 “단합을 확인했다”며 “러시아인의 인내와 연대, 애국심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에게는 “어려운 상황을 해결한 데 대한 그의 기여에 감사한다”고 전했다.

하루 뒤인 27일 푸틴 대통령은 한층 차분한 모습으로 모스크바 크렘린의 대성당 광장에 나타났다. 그는 군과 연방 보안국(FSB) 고위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당신들은 우리 조국을 혼란에서 구했고 실제로 내전을 중단시켰다”고 연설했다. “조국의 진정한 수호자”라고도 치켜세웠다.

푸틴 대통령은 이어 “최전선에서 영웅적으로 싸우는 모든 전투 부대와 국경 지역의 후방 부대 전력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확인됐다”면서 “우리는 특수 작전 지역(우크라이나)의 전투 부대를 재배치할 필요가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바그너그룹과의 전투 중 사망한 러시아 항공기 조종사들을 기리자는 의미에서 묵념을 제안하기도 했다.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 공항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활짝 웃으며 인사하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 공항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활짝 웃으며 인사하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푸틴, 쇼이구 등과 회의하며 반란 사태 분석

크렘린궁은 푸틴 대통령이 이날 연설 직후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부 장관 및 러시아 보안기관 책임자들과 회의를 열고 이번 반란 사태 전반에 대해 분석하고 남은 과제에 대해 논의했다고 전했다. 회의에는 쇼이구 장관을 포함해 안톤 바이노 대통령 비서실장, 블라디미르 콜로콜체프 내무장관, 알렉산드르 보르트니코프 연방보안국장, 빅토르 졸로토프 국가근위대 대장, 알렉산드르 바스트리킨 연방수사위원회 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회의에 참석한 쇼이구 국방부 장관은 발레리 게라시모프 총참모장과 함께 프리고진이 축출을 요구했던 인물로, 이번 반란 사태를 제대로 방어하지 못해 한때 경질설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쇼이구 장관이 반란 종결 직후 러시아 서부군관구를 방문해 전황에 대해 보고를 듣는 장면을 공개한 데 이어 대통령 주재 회의에 참석하면서 건재함을 과시했다. 다라 마시코트 랜드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푸틴의 인사 원칙은 충성심과 안정성”이라며 “한때 푸틴의 최측근이던 프리고진이 러시아를 떠나면 쇼이구 장관의 입지가 더 강화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이 26일 크렘린궁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이 26일 크렘린궁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프리고진 "러시아 전복 꾀하지 않았다" 메시지

한편, 그간 행방이 묘연했던 프리고진은 이날 텔레그램에 11분 길이의 음성메시지를 올렸다. 프리고진은 이번 반란이 러시아 정부의 전복을 꾀한 것이 아니라 불의를 바로잡기 위한 항의 시위였다고 강조했다. 또 자신이 반란에 돌입한 지 단 하루 만에 1000㎞를 진군한 전과를 과시하며 “지난 2월24일(우크라이나 침공)이 어땠어야 했는지 우리가 마스터클래스로 보여줬고, 이번 행진으로 러시아내 심각한 안보 문제가 확인됐다"면서 러시아 국방부의 무능을 재차 저격했다.

프리고진은 24일 루카셴코 대통령의 중재에 따라 반란을 중단하고 벨라루스 망명행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당일 러시아 남부 로스토프나도누를 떠난 뒤 종적을 감춘 상태다. 로이터통신은 “프리고진은 이날 메시지에 자신의 행방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반란을 종식시킨 알 수 없는 합의에 대해 설명하지도 않았다”고 전했다.

지난 24일 토요일 러시아 로스토프나도누의 한 거리에서 바그너 그룹 병사들이 현지 러시아인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24일 토요일 러시아 로스토프나도누의 한 거리에서 바그너 그룹 병사들이 현지 러시아인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날 BBC는 러시아 내에서 프리고진의 입지가 급격히 축소되는 정황이 관측됐다고 전했다. BBC의 팩트체크 탐사보도팀인 ‘BBC 베리파이’에 따르면, 바그너그룹 병사들은 프리고진이 갑자기 모스크바 진군을 멈추고 점령지인 로스토프나노두에서 철수한 것에 대해 격분하고 있다. 자신을 바그너 용병이라고 밝힌 한 남성은 “프리고진이 몰상식한 봉기로 바그너그룹이 파괴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바그너 지지자인 여성은 “용병들은 프리고진에게 완전히 배신당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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