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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제정신이 아닌 당신에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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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황주리 화가

황주리 화가

이상형의 외모와 직업, 성격과 취향 등을 절묘하게 합성한 인공지능과 결혼한 여성의 뉴스를 들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일들이 현실이 되는 풍경이다. 대화가 통하고, 절대 상처 주지 않고, 늙지도 않는 매력적인 인공지능과 함께하는 시간이 공감 능력이 한참 떨어지는 인간과 함께하는 시간보다 훨씬 덜 고독할지 모른다. 현대를 예견한 듯한 쇼펜하우어의 이런 말이 떠오른다. “고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유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스마트폰에 고독을 잃는 사람들
‘묻지마’ 살인범의 썰렁한 답변
이 시대에 ‘제정신’은 과연 뭘까

그림=황주리

그림=황주리

어쩌면 인간 고독의 시대는 끝났다. 아날로그 감성으로 살아온 노인을 제외하고, 신인류는 고독을 즐기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제 고독은 쓸쓸한 감정이 아닌 일상의 선택이다. 스마트폰과 함께 있는 한 아무도 심심하거나 고독을 느끼지 않는다.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혼자 있고 싶어 안달이 난 듯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도대체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물건이 스마트폰이 되리라는 상상을 해보기나 했을까. 스마트폰이 우리 의식과 무의식의 바다이며, 그 안에 한 사람의 잃어버린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세상의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고립 은둔 청년을 생각한다. 하긴 은둔의 시대를 겪어보지 않고 인간이 성장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일정 시간의 은둔을 통과한 성장의 길이 아니라 끝나지 않을 자폐의 길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누군가의 유튜브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온다. “왜곡된 신념에 의지해 망상 속에서 살아가는 당신이여.” 이렇게 급변하는 세상에서 진짜 우리의 실제는 우리가 실제라고 믿는 망상과 일치하는 것일까.

문득 ‘묻지마’ 살인으로 요즘 뉴스의 주인공이 된 젊은 여성이 떠오른다. 살인은 남자만 한다는 편견은 깨진 지 오래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죽여보고 싶었다는 그녀의 사과 아닌 사과에는 물론 진심이 조금도 묻어있지 않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은 절대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을지 모른다.

문득 나 자신도 누굴 죽이고 싶은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보통 사람의 경우 드물게 살의를 느낄 때는 대상이 정해져 있지만, 제정신이 아닌 사람의 경우는 익명의 모르는 사람들을 향한 무작위적인 살인 충동이다. 항공기 문을 멋대로 먼저 열어 탑승객을 공포로 몰아넣은 사람, 갈대가 누워있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어서 불을 질렀다는 사람 등, 세상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로 매일 시끄럽다. 비상구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은 탑승할 때부터 비행 중 두리번거리는 옆 사람의 섬뜩한 표정에 불안을 느꼈다 한다. 옆자리에 앉았던 용감한 사람과 승무원의 침착한 대처로 다행히 일은 크게 진행되지 않았다.

“왜 문을 여셨어요? 선생님 뭐가 그렇게 억울하셨어요? 문을 열면 남들에게 피해가 간다는 걸 알고 있었나요?”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착륙 전 답답해서 빨리 내리고 싶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런 대화들은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죽였나요” 하는 질문처럼 전혀 의미가 없다. 그저 그들은 제정신이 아닐 뿐이다.

세상은 좋아지는 만큼 나빠진다. 적어도 예전엔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란 우리와 다른 특별한 악인이거나 중증 정신병적 장애를 지닌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면, 날이 갈수록 그들은 우리와 무척 가까운 곳곳에 숨어있을지 모른다. 비록 그렇게 극단적이진 아닐지라도 가족이나 이웃, 텔레비전에서 보는 사회 저명인사,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 제정신이 아닐 수 있다는 거다.

고독을 느낄 줄 모르는 스마트폰 인류의 미래는 가히 상상이 불가하다. 요즘 나는 부쩍 전화를 받는 일이 힘들어졌다. 펜데믹 시대를 거치면서 말하는 일도 노동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점점 전화를 걸거나 받는 일이 줄어들었다. 전화벨이 울린다. 아는 사람의 전화다. 나도 모르게 벨 소리가 안 나도록 폰을 뒤집는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카톡으로 나중에 답하지” 라고 뇌 속의 목소리가 중얼거린다. 전화를 걸지도 받지도 않는 시대의 대표자라도 되는 듯 미안함을 슬쩍 뭉개버린다.

계속 부재중 전화를 해대면 스토킹 범죄가 되는 시대, 이럴 때는 이 시대가 마음에 든다. 젊을 때는 친구들과 동이 틀 때까지 통화하던 내가 전화 받는 일이 힘들어졌다는 걸 믿을 수 없다. 최근에 남편을 잃으신 구십 노인의 말씀이 생각난다. “어떤 날은 전화가 한 통도 안 와. 하루가 백 년 같이 느껴질 때가 있어.” 하루가 백 년처럼 느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는 제정신인가. 지인들이여, 내가 전화를 안 받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문자나 카톡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황주리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