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아낌없이 주는 나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아주 드문 경우지만 간혹 책을 추천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나는 별 주저함 없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지나쳐 간 사람들』, 이 두 권의 책을 추천한다. 내게는 벌써 45년의 시간을 같이한, 진한 우정이 배어나는 친구 같은 책이다. 고등학생이었던 1977년 나는 이 책들과 함께 『이상한 나라의 숫자들』, 그리고 좀 더 알려진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모두 네 권의 책을 샀다. 낡고 빛바랜 책에는 ‘77.6.25.’라는 구입 날짜와 ‘나의 소유’가 되었음을 밝히는 글귀가 있다.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네 권 모두 마찬가지이지만, 책이 얇아 읽기에 부담이 없고 글에 상상력을 더하는 삽화가 아주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글자가 그리 많지 않고 짤막한 내용을 담아 아이들 그림책처럼 보이지만, 생각에 생각을 더하게 하는 책으로, 이 책을 손에 넣게 되었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책꽂이에서 떠난 적인 없는 몇 권 안 되는 책이다. 독일 유학길에도 함께했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짐 속에도 다시 챙겨 넣었다.

45년 동안 함께한 친구 같은 책
모든 것 내주고도 행복한 나무
남을 돕기 전 핑계만 찾는 이들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처음 읽으면서 느꼈던 감동을 지금까지 기억한다. 무심하게 책장을 넘기며 예쁜 삽화에 마음을 뺏긴 채, 몇 줄 안 되는 글로 채워진 책 중간 즈음까지 읽었을 때 ‘이만하면 줄 만큼 다 준 것이겠지’ 하던 기대가 자꾸만 미뤄지며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친구였던 크고 멋진 나무는 소년이 성장하며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되어 자신을 내주었고, 그가 노인이 되어 힘도 잃고, 쉴 곳을 찾아 헤맬 때, 다 베어내 주고 밑동만 남은 채로 이렇게 말을 건넨다.

“앉아서 쉬기에는 늙은 나무 밑동이 그만이야. 이리로 와 앉아서 쉬도록 해”라고. 그렇게 그 나무는 자기가 가진 것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그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던 삽화와 한 줄 이야기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는 그 날 이후로 내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다.

에드 설리번의 『지나쳐 간 사람들』도 그림에 글씨가 얹힌 것 같은 짧은 이야기이지만, 글을 읽으면서 가졌던 갈등과 부끄러움, 자신을 위한 변명 그 어느 것 하나도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우연히 물 밖으로 밀려 나오게 된 ‘욱’이라는 이름의 물고기는 혼자 힘으로는 다시 물로 돌아가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계속 가빠지는 숨을 몰아쉬면서. 그의 곁을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위한 온갖 구실을 만들기에 바쁘다.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욱’이를 돕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는 둥, 너무 바쁘다는 둥. 겉으로는 합당해 보이는 온갖 핑계를 만들며 자신에게 면죄부를 줄 때, 정작 자신을 도울 수 없었던 ‘욱’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로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맞게 된다.

‘욱’이의 고통스럽고도 절박한 외침을 들으면서도, 그를 외면할 수 있는 당위적 변명거리만 생각하며 ‘지나쳐 간 사람들’이 바로 ‘나’였고, 지금의 ‘나’이기도 하다. 이제라도 감히 이런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드는 ‘나’는 달라진 것일까. 아니, 그런 나는 아직도 없다. 나는 여전히 손을 내밀어 도움을 주어야 하는 순간에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세며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내게 그럴 여유가 있나? 내가 그래 봤자 별 도움이 될까? 나의 도움이 정말 순수한 의미로 전달될까? 작은 몸짓 하나면 충분한데도, 그에 앞서 수만 가지 생각을 떠올리며 나를 위한 변명만을 찾기 바쁘다. 나는 뻔히 보이는 죽음을 앞에 두고 숨을 헐떡이는 ‘욱’이를 보면서도 지나쳐 가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이런 책을 출판한 분도출판사가 어떤 종교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였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당시 연지동에 있었고, 지금의 직장도 혜화역이 그리 멀지 않은데, 혜화역 근처 낙산 아래 그렇게 유서 깊은 가톨릭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지냈었다. 그렇게 둘러본 혜화역 중심의 사방은 여러 가지로 눈길을 사로잡는 역사적 자취가 혼재되어 있다. 불교·기독교·천주교·유교 사상까지 모두가 오밀조밀 모여 있는 형상으로, 자신과 가족, 그리고 국가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는 공통점을 가진 이종의 교집합을 이루는 곳이다.

긴 세월 나와 함께 책꽂이에 남아있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지나쳐 간 사람들』을 간혹 찾아 손에 들면, 늘 처음 대하듯 그 느낌이 전해온다. 언제 다시 읽어도 내가 다 해내지 못한 이야기이고, 여전한 내 모습의 오늘 이야기이다. 다른 사람에게 감히 추천이라는 외람된 용기를 내보는 책이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 안에서 부끄럽게 투영되어 있는 스스로를 확인한다. 아무것도 내어주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가는 한 사람으로.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