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마을] 입고 또 입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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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우리나라를 떠나온 값비싼 여름휴가치곤 공항의 첫 인상부터 나를 당혹케 했다.

수세식 변기며 세면대, 식수대 등 물이 나와야 할 곳 어디든 바싹 말라 있었다. 철 지난 휴가지의 여인숙마냥 썰렁하기 그지없는 호텔에서도 물은 종종 자취를 감추었다.

거리엔 한국 중고차 시장에서 번호표도 떼지 않고 팔려 온 버스들이 차선 없는 비포장길을 털털거리며 내달렸다.

1년 중 겨울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라답게 7월말인데도 새벽녘 기온은 영하로 곤두박질쳤다. 난 추위에 덜덜 떨며, 다음번 몽골에 올 때는 꼭 내복을 챙겨와 더 많은 일을 하리라 마음 먹었다.

몽골을 다녀온 뒤부터 나는 겨울철만 되면 할인마트에 아이들 키 높이만큼 쌓아놓은 채 파격세일을 해대는 내복 상자들에 마음을 빼앗겼다. 다시 몽골에 갈 날을 그리며 옷장 속에 내복 상자들을 차곡차곡 쌓여갔다.

올 봄이었다. 어버이날을 맞아 딸아이와 시골 친정집에 갔다. 식당을 운영하시는 부모님을 도울 양으로 집안 청소와 빨래에 매달렸다.

세탁기 안 빨래를 꺼내 건조대에 너는 순간, 차마 옷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엄마의 내복이 손에 잡혔다. 나는 빨래를 널다 말고, 도대체 어디로 머리를 넣고 팔을 빼야 할지조차 구분 안 되는 정체불명의 천 쪼가리들을 휴지통에 던져넣으며 엄마에게 소리쳤다.

"엄마, 왜 이런 걸 입어! 내복 살 돈도 없어?"

엄마는 하시던 일을 팽개치고 달려와선 금덩이라도 건져내듯 그 정체불명의 젖은 내복들을 휴지통에서 꺼내셨다.

"아, 이거 올해까지는 충분히 입어야."

나이 들수록 옷을 입어도 입어도 몸이 시려, 다 떨어져가는 내복도 버릴 수 없다는 엄마의 체감온도는 언제나 몽골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1년 내내 몽골을 느끼고 사시는 엄마에게 내가 애지중지 간직해온 내복들을 모두 보내드렸다. 그리고 또 다시 찾아온 겨울, 나는 오늘도 할인마트에서 내복상자들 속을 서성인다.

김미선(30.주부.화성시 기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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