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다, 일본 기업 공격 경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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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마쓰시타는 올해 여름 북미시장에서 1인치 당 5000엔대의 PDP TV를 내놓았다. 지난해 가을 1인치당 1만엔 짜리 제품을 내놓은 지 채 1년도 안된 시점이다. 마쓰시타의 가격 공세로 삼성과 LG 등 한국업체들도 울며 겨자먹기로 가격을 내리고 있지만 채산성 때문에 고민이다. 마쓰시타의 가격 인하는 직접적으로는 엔저(低) 의 도움을 받았지만, 올 6월 연산 340만대로 늘린 생산라인 덕분에 가능했다. 이 회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연 190만장 규모의 제 2공장을 짓고 있다.

'잃어버린 10년'에서 깨어난 일본 기업이 크게 호전된 실적을 밑천 삼아 공격 경영에 나서고 있다. 이런 일본 기업의 약진은 주력 업종이 비슷한 한국 기업에 위협이 될 수 밖에 없다. 22일 '일본기업의 공격경영'이라는 보고서를 낸 삼성경제연구소의 김종년 수석연구원은 "지난 10여년간 일본 기업의 수비적 경영으로 한국 기업은 세계 시장에서 반사 이익을 보았지만 이제 한판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일본 기업의 지난해 세전 순이익은 전년 대비 16.7%나 늘어난 50조4000억엔. 도요타 등 상당수 대표기업이 사상 최고의 실적을 거뒀다. 적자였던 도시바도 흑자로 돌았다. 주머니가 불룩해진 일본 기업들은 설비투자, 해외기업 인수합병(M&A), 미래 수종사업 발굴 등에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달에는 도시바가 미국의 웨스팅하우스를 41억6000만달러에 인수했다. 올 초에는 세계 6위의 유리제조업체 일본판초자(NSG)가 영국의 세계 3위 업체 필킹턴을 품에 안았다. 전자.자동차를 중심으로 제조업 설비투자도 4년 연속 두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하는 등 일본 산업계는 완연한 활기다.

특히 중국.인도.베트남 등에 투자를 집중해 신흥시장에서도 한국기업에 자리를 뺏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일본 기업의 부활은 버블 붕괴 이후 설비.부채.인력 과잉이 해소되면서 경영체질이 개선된 때문이다. 거기에 일본식 경영과 글로벌 스탠더드가 혼합된 '하이브리드 경영'이 효과를 봤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성큼성큼 뛰기 시작한 일본기업에 비해 한국기업은 게걸음이다. 설비투자는 3년 연속 한자리 수를 벗어나지 못했고 우량 기업들도 투자처를 찾지 못해 돈을 쌓아두고 있다. 9월 말 현재 12월 결산 제조업체 535개사의 평균 유보율은 609%로 작년 말보다 40%포인트나 높아졌다. 이런 투자 부진은 원화 강세 등과 맞물려 한국 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

김종년 수석연구원은 "한국기업의 강점인 스피드와 과감한 의사결정구조를 강화하고, 이미 입지를 확보한 신흥시장에서 공격적으로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일간 과잉경쟁을 피하기 위한 양국 기업간 협력 전략도 병행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이현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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