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형사재판소(ICC)가 지난 17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 사실을 공개하면서 그의 전쟁범죄 관련 혐의의 진상이 밝혀질 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아진다. 지난해 2월 24일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푸틴 대통령이 전쟁범죄 피의자로 특정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푸틴 대통령이 실제 전범 재판대에 설 가능성은 높지 않겠지만 그의 국제적ㆍ정치적 입지를 위축시킬 수 있고 그만큼 상징성이 큰 조치라는 평가가 나온다.
ICC "푸틴에 '아동 불법이주' 전범 책임"
ICC 전심재판부(Pre-Trial Chamber)는 17일 성명을 통해 "푸틴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 점령 지역에서 러시아 연방으로 아동을 불법 이주시킨 전쟁범죄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볼 만한 합리적 근거가 있다"고 체포영장 발부 배경을 밝혔다.
재판부는 푸틴 대통령과 함께 마리야 리보바-벨로바(38) 러시아 대통령실 아동인권 담당 위원에 대해서도 같은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리보바-벨로바가 푸틴의 아동 강제이주 정책을 구조 활동으로 둔갑시키는 일에 관여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는 이렇게 이주시킨 우크라이나 아동들에게 재교육을 통해 정치적 사상을 주입하고 있다는 게 서방 언론의 시각이다.
러시아 측은 그간 인도주의적 목적에서 고아 등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 아동 2000명을 자국으로 이주시켰다고 주장해 왔는데, 이에 대해 ICC가 전쟁범죄에 해당한다고 명시한 것이다. 우크라이나 측은 개전 이후 부모 동의 없이 러시아로 납치된 아동이 현재까지 최소 1만6226명에 달한다고 보고 있다. 강제이주는 ICC 설립 규정인 로마협정에 따라 범죄로 인정된다.
ICC는 국제사회에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해당 국가가 기소할 수 없을 때 개인을 수사하고 처벌하는 유일한 상설 국제기구다. 집단살해,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 침략범죄 등을 다룬다.
ICC가 지금까지 국가원수급에 체포영장을 발부한 건 오마르 알바시르 전 수단 대통령,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 등 2명뿐이다. 특히 전쟁범죄가 현재진행형인 가운데 현직 국가원수에게 ICC가 체포영장을 발부한 건 이례적인 일이라고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푸틴, 실제 심판대 설지는 미지수
그러나 푸틴 대통령이 국제법정에 실제로 설지는 미지수다. 체포영장 발부 후 개별 국가가 ICC 규정과 국내법 절차에 따라 체포 및 인도 청구를 이행해야 하지만, 러시아는 2016년 ICC에서 탈퇴한 비회원국이라 자발적 협조를 얻기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ICC는 피고인이 불참한 궐석재판을 인정하지 않고, 영장 집행을 강제할 권한도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실제 집행 여부와 관계없이 체포영장 발부 그 자체만으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는 분석이 나온다. NYT는 "이번 ICC의 결정은 침공 1년 넘게 처벌받지 않고 있는 푸틴과 그 주변 인물들에 경각심을 일깨우며 도덕적 무게를 실감케 했다"고 전했다.
한편으론 ICC에 가입한 전 세계 123개국이 푸틴을 피의자로 체포할 수 있는 만큼 향후 러시아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효과가 있다고 CNN이 전했다.
일각에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등이 전쟁범죄 혐의로 국제법정에서 죗값을 치른 사례가 있는 만큼 푸틴도 결국 심판대에 오를 것이란 관측도 없지 않다.
우크라이나 측은 ICC의 체포영장 발부에 환영의 뜻을 밝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날 밤 "역사적 책임의 서두"라며 "테러 국가의 지휘권을 가진 최고지도자의 명령 없이는 강제이주 범죄가 시행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국방정보부 쪽에선 ICC 체포영장 발부 이후 러시아 크렘린궁이 푸틴 대통령 후임 물색에 나섰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러시아 측은 ICC의 결정을 무효라고 일축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크렘린궁 대변인은 트위터에 "러시아는 다른 여러 국가와 마찬가지로 ICC의 관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며 "따라서 이 같은 결정은 러시아 연방에 대해 법적인 관점에서 무효하다"고 했다.
푸틴, 보란 듯 우크라 점령지 시찰
이런 가운데 푸틴 대통령은 이번 침공으로 점령한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도네츠크·루한스크) 지역의 마리우폴을 시찰하는 등 이례적인 공개 행보를 이어갔다. 러시아 관영 타스 통신은 19일 "푸틴 대통령이 마리우폴을 실무방문해 시내 여러 장소를 시찰했다"고 전했다. 개전 이후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내 점령지 방문이 공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마리우폴은 지난해 3월 17일 러시아가 극장을 폭격해 최소 600명이 숨지는 등 전쟁 초기 우크라이나 남부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범죄가 벌어진 지역이다. 푸틴 대통령이 이런 지역을 전격적으로 방문한 것은 전쟁범죄 혐의로 자신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한 ICC를 겨냥한 도발적 답변을 내놓은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푸틴 대통령은 18일에는 보란 듯이 크림반도를 깜짝 방문했다. 크림반도 강제병합 9주년을 맞아 이뤄진 방문이었다. 미 NYT는 "(푸틴의 크림반도와 마리우폴) 고위급 방문은 ICC 체포영장 발부에 대한 크렘린의 항변 제스처이기도 하다"고 풀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