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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 불륜 들킨 그때, 10만명 죽은 진짜 '막장'이 펼쳐졌다 [영화로운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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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사전임주리의 영화로운 세계

국제 뉴스는 너무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리곤 합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 낯선 땅의 사람들에게 금세 감정 이입이 되죠. 영화를 통해 더이상 ‘먼 나라’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로 국제 뉴스를 전합니다.

영화 '끝까지 살아 남아라: 제2차 세계대전' 스틸 이미지

영화 '끝까지 살아 남아라: 제2차 세계대전' 스틸 이미지

1939년 폴란드 볼히니아. 갓 소녀 티를 벗은 조피아(미칼리나 라바츠)는 언니의 결혼식 날, 덩달아 신이 났습니다. 자신도 곧 남자친구와 결혼을 할 거란 꿈에 부풀었거든요. 그러나 그녀의 꿈은 아버지가 나이 많은 폴란드인 지주와 억지로 결혼시키며 산산이 조각나고 맙니다. 사실, 조피아는 이미 남자친구의 아이를 가졌는데 말이죠.

고된 시집살이 중 몰래 헛간에서 연인과 껴안는 조피아, 그 뒤로 남편이 들어오는데…. 뻔하디뻔한 ‘막장’ 스토리가 시작되려는 찰나, 진짜 ‘막장’이 펼쳐집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거죠. 영화 ‘끝까지 살아 남아라’의 주인공들은 무사할 수 있을까요.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이어 지난 21일(현지시간) 폴란드를 찾았습니다. 동맹국을 다독인 바이든은 “폴란드는 우리의 위대한 동맹국이며 당신들에게 큰 감사를 보낸다”고 이 나라에 거듭 찬사를 보냈죠. 미국의 지도자가 폴란드를 콕 집어 방문한 건, 전쟁 이후 존재감이 커진 이곳의 위상을 보여줍니다. “폴란드의 힘이 그만큼 커졌단 의미”(뉴욕타임스) “유럽연합에 번번이 반기를 들며 미움받았던 폴란드의 승격”(워싱턴포스트)이란 해석들이 나왔죠.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는 최근 인터뷰에서 “힘의 중심이 (서유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자신감마저 내비쳤어요.

그도 그럴 것이 폴란드는 이번 전쟁에서 서방의 병참기지 역할을 하며 매우 적극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돕고 있거든요. 군사ㆍ인도적 지원을 쏟아부었고 난민(약 200만 명)도 가장 많이 받아들였죠.

그런데요, 사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는 오랫동안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앞서 소개한 영화가 바로 그 이야기를 담고 있죠.

21일 폴란드를 찾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이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을 만난 모습. UPI=연합뉴스

21일 폴란드를 찾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이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을 만난 모습. UPI=연합뉴스

영화 속 조피아가 사는 폴란드 볼히니아는 현재는 우크라이나 영토가 된 접경지대로 예로부터 양국민이 어울려 살던 지역입니다. 당시 독립국가가 아니었던 우크라이나는 대부분 소비에트연방(소련)에 속해 있었는데, 이곳 만큼은 폴란드 땅이었죠. 조피아의 언니는 폴란드인이지만 우크라이나 남자와 결혼식을 올리는데요. 이 지역 우크라인들의 솔직한 마음속엔 폴란드인을 향한 증오가 뿌리 깊었습니다. 폴란드인 지주가 우크라인을 소작농으로 부리는 구조가 오랫동안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죠.

영화에선 2차 세계대전 발발 후 혼란을 틈타 이곳 우크라인들이 민병대를 결성해 폴란드인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비극'이 그려집니다. 서로 죽고 죽이며 마을은 피바다가 되죠. “우리, 친구였잖아” “그 친구들이 우리한테 그럴 리가 없어”란 마을 사람들의 희망은 불길 속 재가 되고 맙니다. 남자친구에게 “나만 사랑할 거야?”라고 새침을 떨던 조피아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못할 것이 없는 억척 엄마가 되어가죠. 한 걸음만 잘못 떼도 죽을 수 있는 상황, 이야기는 눈을 떼지 못하도록 숨 가쁘게 흘러갑니다.

영화 '끝까지 살아 남아라: 제2차 세계대전' 스틸 이미지

영화 '끝까지 살아 남아라: 제2차 세계대전' 스틸 이미지

조피아의 여정을 쫓다 보면, 현재 양국이 ‘절친’이란 게 어색할 정도인데요. 다행히 두 나라는 냉전이 끝난 후 서서히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에 깊은 원한과 두려움을 가진 폴란드의 ‘반러 감정’이 폭발해 양국 간 우애가 더 깊어졌죠. 폴란드 역시 18세기 이후 러시아에 오랫동안 수탈당했고, 2차 대전 때도 공격받았거든요. 이번 전쟁 이후 러시아에서 완전히 등돌리게 된 우크라이나를 '원팀'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겁니다.

흥미로운 건, 폴란드가 내친김에 “유럽 최대 군사강국”(NYTㆍWP)을 꿈꾸고 있단 사실입니다. 폴란드 정부는 올해 국방예산을 GDP의 4%(현재 2.4%)로 올린단 목표를 세웠는데요. 이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 목표치의 2배입니다. 미국(3.3%)보다도 높죠. 또 군 현대화를 목표로 이달 초 미국과 100억 달러(약 13조원) 규모의 무기 계약을 체결했고요, 지난해 한국에선 20조원 넘는 무기를 사들였습니다. 미국 주력전차 에이브람스ㆍ전투기 F-35, 한국의 K2탱크 등이죠.

폴란드 군인들이 훈련하는 군사기지의 모습. 레오파르트2 주력전차가 보인다. 폴란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며 '유럽 군사강국'을 꿈꾸고 있다. AP=뉴시스

폴란드 군인들이 훈련하는 군사기지의 모습. 레오파르트2 주력전차가 보인다. 폴란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며 '유럽 군사강국'을 꿈꾸고 있다. AP=뉴시스

몇 년 내 전투병력을 현재의 3배인 30만명으로 늘린단 계획도 당찹니다. 현재 가장 많은 군을 보유하고 있는 프랑스의 병력이 20만이니 ‘유럽 1위’가 목표인 거죠. 징병제는 2008년 폐지됐지만, 군대 자원자는 늘고 있습니다. 21일 CNN에 따르면 전쟁 발발 후 폴란드 영토방위군의 ‘파트타임’ 군인 모집에 은행가ㆍ학생ㆍ주부 등 각양각색의 지원자들이 넘쳐난답니다.

폴란드의 ‘군사강국 야심’은 마침 미국 목표와도 맞아떨어져 가속도가 붙고 있습니다. 미국은 러시아ㆍ중국이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걸 견제하고 있었는데요, 나토 최전방,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에서 완충국 역할을 하는 폴란드가 적극적으로 무장한다면 환영할 수밖에요.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 AP=뉴시스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 AP=뉴시스

너무 오버 아니냐고요? 폴란드는 국토 대부분이 평야인 탓에 숱한 전쟁을 겪었습니다. 2차대전 때는 독일 침공 한 달 만에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가 되고 말았는데, 그때 어떤 나라의 도움도 받지 못했단 게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아 있습니다. 영화 ‘끝까지 살아 남아라’ 초반부에는 맥없이 패한 폴란드 군인들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인사를 나누고선 각자 고향으로 향하는 모습이 나오는데요. 당시 이들이 패하지 않았더라면 조피아가 겪은 ‘볼히니아의 대학살’(10만 명 학살 추정)은 없었을 거란, 감독의 연출 의도가 엿보이는 장면이죠.

역사가 일러주듯 튼튼한 국방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개인의 삶은 예기치 않은 죽음과 보복으로 뒤엉켜 엉망이 되고 맙니다. 다만 현실에선 국방비가 늘면 공공 서비스 등이 줄어들고 일상이 팍팍해지기 마련이죠. 그래서 폴란드에서도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물가상승 등을 탓하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일각에선 올해 11월 총선을 앞두고 우파 집권당이 일부러 ‘공포’를 자극한다고도 비판하죠. 폴란드의 군사강국 현실화가 수월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이유입니다.

영화 '끝까지 살아 남아라: 제2차 세계대전' 스틸 이미지

영화 '끝까지 살아 남아라: 제2차 세계대전' 스틸 이미지

영화 ‘끝까지 살아 남아라’에선 인류의 ‘막장’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겠구나 싶은 일들이 펼쳐집니다. 그럼에도 조피아는 죽음을 각오하고 독일군에 쫓기는 유대인들을 돌봐주죠. 그리고 그녀와 아들 역시 죽음 직전 타인의 도움으로 살아납니다. 이런 마음들이 있었기에 우리 인류가 여태껏 살아남았을 것이라고 이 작품은 말하는지도 몰라요. 전쟁 1년, 그 '마음'들은 이제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는 강력한 힘으로 이어진 듯합니다. '군사강국' 야심도 좋지만, 일단 이웃을 돕고 보자며 팔을 걷어붙인 일반 폴란드 시민들 사이에서요.

용어사전영화 '끝까지 살아 남아라: 제2차 세계대전'

폴란드의 유명 감독 보이첵 스마르좁스키가 2016년 내놓은 전쟁 영화다. 원제는 '증오(Hatred)'로 실제 당시 대학살 생존자인 폴란드 작가 스타니스와프 스로코프스키의 동명 단편 기록집을 원작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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