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금반지 받고 배신? 발뺐던 美도 유혹...'밀당 달인'된 이곳 [영화로운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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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뉴스는 너무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리곤 합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 낯선 땅의 사람들에게 금세 감정 이입이 되죠. 영화를 통해 더이상 ‘먼 나라’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로 국제 뉴스를 전합니다.

영화 '아이카' 스틸 이미지

영화 '아이카' 스틸 이미지

아이를 막 낳은 여자(아이카)가 엉금엉금 기다시피 몰래 병원을 빠져나옵니다. 폭설이 덮친 러시아 모스크바, 아이카가 향하는 곳은 닭 공장입니다. 열악한 공장에서 하혈을 하면서도 종일 닭털을 벗겼는데 세상에, 주인이 급여를 떼먹고 도망갔다네요. 아이카와 동료들이 불법 이주노동자란 걸 악용한 겁니다.

그런데 아이카는 성치 않은 몸으로 사채업자에 쫓기면서도 고향 키르기스스탄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합니다. 갓난아기를 버리고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영화 ‘아이카’ 속 주인공에겐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요.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아이카가 어떻게든 떠나고자 했던 그곳, 중앙아시아(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가 최근 강대국들 사이에서 ‘핫’하게 떠오르고 있습니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중앙아시아를 찾았는데요. 조 바이든 정부에서 고위 당국자가 이곳을 방문한 건 처음이었죠. 그는 약 2500만 달러(약 330억원) 지원을 약속하며 “러시아와 무역을 줄일 수 있게 돕겠다”고까지 했습니다.

이어 지난 7일엔 중국이 올해 외교정책을 발표하며 곧 ‘중국+중앙아시아 5개국 정상회의’가 열린다고 강조했어요. ‘제1회’라면서요.

유라시아 대륙의 한복판에 있어 지정학적으로 중요하고, 자원이 풍부해 일단 친해지면 이득이란 것도 알겠는데… 왜 요즘 들어 부쩍 이곳에 강대국의 러브콜이 쏟아지는 걸까. 이곳의 전통강자인 러시아의 힘이 빠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발발한 후 러시아가 장악한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주. 로이터=연합뉴스

전쟁이 발발한 후 러시아가 장악한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주. 로이터=연합뉴스

중앙아시아는 ‘러시아의 뒷마당’으로 불릴 만큼 러시아의 영향력이 큰 곳입니다. 90년대 초 구소련에서 독립했지만 정치·경제적으로 워낙 밀착돼 있거든요. 심지어 지난해 1월 카자흐스탄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을 때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이 요청해 러시아군이 투입됐을 정도니, 그 영향력이 짐작되시죠?

여러모로 가깝다 보니 경제가 취약한 이들 국가에선, 수많은 이가 일자리를 찾아 러시아로 향하기도 합니다. 영화 ‘아이카’에선 열악한 환경과 추방의 위협에도 주인공과 동료들이 어떻게든 러시아에서 버티려 하는데요. 이들의 눈에 모스크바는 비정하지만 ‘기회가 있는 곳’이거든요. 아이카는 거의 죽을 지경이면서도, 고향으로 돌아오란 언니의 말에 이렇게 소리쳐요.

“나도 애 다섯 낳고 쓰레기 위에서 살라고? 난 그런 인생을 원하지 않아. 나는 하고 싶은 사업이 있다고.”

영화 '아이카' 스틸 이미지. 갓 아이를 낳은 아이카(왼쪽)가 동료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닭 공장에서 일하는 장면이다.

영화 '아이카' 스틸 이미지. 갓 아이를 낳은 아이카(왼쪽)가 동료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닭 공장에서 일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지난해 2월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며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전쟁 중에 ‘뒷마당’을 살필 여력이 있겠어요? “러시아 입김이 전례 없는 속도로 약해지고 있다”(포린폴리시 연구소)는 분석이 나왔죠.

옳거니, 이 틈을 타 중앙아시아 5개국은 러시아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에서 러시아 편을 들지 않은 것은 물론, 가장 덩치가 큰 카자흐스탄을 필두로 러시아를 떠나는 외국 기업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있는 겁니다.

지난해 말 독립국가연합(CIS, 구소련 독립국 중 친러 성향 8개국) 정상회담 때 이들 국가 정상에게 특별한 금반지까지 선물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겁니다. 당시 “탐욕이 담긴 반지를 인간들에게 나눠준 사우론(영화 '반지의 제왕' 속 암흑의 군주) 같다”며 엄청난 비웃음까지 샀거든요.

푸틴 대통령이 독립국가연합(CIS) 정상 8명에게 선물한 금반지. 사진 모스크바타임스 캡처

푸틴 대통령이 독립국가연합(CIS) 정상 8명에게 선물한 금반지. 사진 모스크바타임스 캡처

중앙아시아 5개국이 푸틴과의 거리두기에 들어가자 가장 먼저 손을 뻗은 건, 중국이었습니다.

중국은 그간 ‘일대일로 프로젝트’로 이곳에 공을 들였는데요. 지난해 9월, 시진핑 국가주석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택한 해외 방문지가 중앙아시아였을 정도입니다. 지난달엔 ‘제1회 중국+중앙아시아 5개국’ 투자협력포럼을 열었고, 러시아를 통하지 않고 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을 거쳐 유럽으로 바로 가는 철도(CKU) 건설도 올해 안에 시작한답니다.

중국이 움직이자 중앙아시아에서 발을 뺐던 미국도 부랴부랴 돌아온 겁니다. “(전 분야에서 중국을 압박 중인) 미국의 국가안보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지역”(더힐)이 됐거든요. 사실 미국은 2021년 이들 5개국과 국경을 맞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한 이후, 이 지역에서 급속도로 입지가 줄어든 마당이었는데 말이죠.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왼쪽)과 무크타르 틸루베르디 카자흐스탄 외무장관이 지난달 28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만났다. AP=연합뉴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왼쪽)과 무크타르 틸루베르디 카자흐스탄 외무장관이 지난달 28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만났다. AP=연합뉴스

러시아에 중국에 미국까지…. ‘삼다리’에서 끝이 아닙니다. ‘우린 같은 투르크족’이라며 문화적 유대감으로 밀착하는 튀르키예가 인프라 지원 등으로 인심을 팍팍 쓰고 있고요, 서방 제재를 피해 활로를 찾는 이란도 이 지역으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주목해야 할 건, 이 기회에 ‘다자주의 외교’를 굳건히 하겠다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태도입니다. 말하자면 강대국들과 ‘밀당’을 통해 자국 이익을 최대한 끌어내 보겠단 거죠. 가까운 만큼 상처도 많이 줬던 러시아, 일대일로를 이유로 빚을 잔뜩 지게 한 중국 사이에서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은 거랄까요.

예컨대 이런 식입니다.

이 5개국은 러시아가 주장하는 우크라이나의 점령지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러시아를 비판하는 유엔 결의안 채택엔 기권했습니다. 미국 국무장관 방문을 환영하면서도 그가 오기 3일 전엔 "(우크라이나 사태의 정치적 해결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지지한다"며 슬쩍 중국의 손을 들어줬죠. “중앙아시아는 그 어느 쪽도 실망시키지 않고 균형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호주 이스트아시아포럼)는 평가가 나옵니다.

지난해 9월 카자흐스탄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신화=연합뉴스

지난해 9월 카자흐스탄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신화=연합뉴스

러브콜이 쏟아진다고 당장 장밋빛 미래가 보이는 건 아닙니다. 5개국 정부 모두 권위주의적인 데다, 앞서 소개한 영화에서 엿볼 수 있듯 경제가 무척 어렵죠. 지금 분위기는 좋지만 "자칫 강대국들에 이용만 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이빨 빠진 호랑이'라 해도 러시아와 워낙 오래 관계를 맺어온 탓에, 그 굴레를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이란 경고도 나와요.

그래서 전문가들은 가장 중요한 건 5개국끼리의 통합과 연대라고 조언합니다. 사실 이들 사이엔 수자원·국경 분쟁 등으로 쭉 갈등이 있었거든요. 다행이라면 최근 들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정상이 연이어 만나는 등 서로 소통하는 일이 꽤 늘었단 겁니다.

‘연대’가 중요하다고 하니, 영화 ‘아이카’의 한 장면이 떠오르네요. 쓰러지기 직전인 아이카에게 처음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민 이는 부유한 러시아인이 아니라 동료 이주노동자였습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아이카가 웃는 모습이 나오죠. 그녀가 아기를 버린 이유와 마지막 선택이 밝혀지는 결말에서, 그 장면이 더욱 아프게 다가옵니다.

‘강대국의 러브콜’ ‘잇따르는 구애’와 같은 말들이 곳곳의 ‘아이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습니다.

영화 '아이카' 스틸 이미지

영화 '아이카' 스틸 이미지

용어사전영화 '아이카'

카자흐스탄 출신의 저명한 감독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가 2018년 내놓은 영화. 주연을 맡은 배우 사말 예슬라모바가 이 작품으로 제71회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드보르체보이 감독은 키르기스스탄 출신의 여성이 모스크바의 병원에 버리는 아기가 한 해에 무려 200명이 넘는다는 기사를 보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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