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 만나자” 하산뜻 밝혀/전두환씨 은둔 2년… 백담사의 요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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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연희동 안된다」에 강한 반발/추위로 관광객 줄어… 전기·돌다리 놓아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가 백담사에 은둔한 지 23일로 만 2년된다.
이들은 지난해 두어 차례의 봉정암 등정과 국회증언을 위한 서울나들이,지난 여름 속초에 바람을 쐬러 나간 외에는 꼬박 이곳에 묻혀 지냈다.
하산시기를 놓고 구구한 억측이 일고 있는 가운데 그들 내외는 산사에서 세 번째 겨울을 날 채비를 하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의 회갑(1월18일)도 여기에서 치를 것이다.
전 전 대통령은 21일 백담사를 방문한 기자에게 『서울에서 만나자』며 자신의 하산이 가까워졌음을 분명하게 풍겼다.
이날 백담사는 영하 7도로 갑자기 기온이 떨어져 설악의 찬바람으로 얼어붙는 듯했다.
날씨 탓인지 한때 하루 4천명까지도 찾던 방문객수는 훨씬 줄어 다른 날이면 저녁 늦게까지 계속되던 이들의 접견과 기념촬영도 오후 4시 무렵 끝났다. 추운 날씨로 설법 순서도 생략됐다.
7백여 명의 방문객이 돌아간 뒤 이들 내외는 거처인 만해당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전북이 고향이라는 20여 명의 일가친척과 신혼부부 한쌍이 접견을 간청하자 선뜻 응해줬다.
일행 중의 한 중년남자가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이들이 떠나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던 전 전 대통령은 뒤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기자에게 고개를 돌려 말을 건넸다. 측근을 통해 잠시 면담할 기회를 미리 청해놨었다.
『김 기자죠. 지난해는 안경을 썼었는데….』
지난해 이맘 때 보도진의 출입차단을 피해 안경을 쓰고 잠입,잠시 스쳐가며 인사를 나눴던 그때를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근황을 묻자 그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전 전 대통령은 『여기는 멀리 떨어져 어려우니 서울 가서 자주 만나자』고 말했다.
「서울」이라는 말이 강하게 느껴져왔다.
하산하더라도 서울은 안된다는 정부 쪽 의견이나 여론을 그가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그는 「서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갑작스런 이 말에 다음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곁에 있던 이순자 여사가 『저분의 건강은 아주 좋다』며 화제를 바꾸었다. 감기에 걸렸지만 2년 만에 처음이니 그만하면 아주 건강한 것이 아니냐며 차분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전씨는 대구공고 동창들의 교통사고로 충격을 받아 지난 16일 주치의가 다녀갔었다.
이 여사의 재촉으로 전씨가 만해당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바람에 만남은 순간적으로 끝나버렸다. 작별인사를 하고 백담사를 떠나서도 서울가서 만나자는 그의 말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23일로 다가온 은둔 2주년을 맞아 22일 저녁엔 그의 측근,친지들이 모인다고 했다.
발걸음을 삼가고 있는 장세동씨도 오고 안현태 전 경호실장,법정대리인 이양우 변호사,민정기 비서관 등이 모이는데 주요 논의사항은 아무래도 그의 하산시기와 거처가 될 것이라는 게 측근들의 귀띔이다.
그의 한 측근은 전씨의 최근 심기가 지극히 가라앉아 있다고 전했다.
지난 8월 노태우 대통령이 백담사에 새로 가설된 핫라인을 통해 전화통화를 했었는데 그 며칠 후 처남 이창석씨가 법정구속돼 크게 낙심했고 그때의 감정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다고 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하산을 권유하면서도 국민의 감정 등을 고려,연희동 사저로의 귀환은 어려우니 서울근교에 장소를 물색하겠노라고 제의했다고 한다.
이에 전 전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백담사에 떼밀려왔지만 내려가는 문제는 전적으로 자신이 결정하겠다며 소리를 높였다는 얘기다.
이씨의 법정구속은 실상 정부측도 예상못한 것이어서 상당히 당황했다는 것이고 정부측의 노력으로 이씨가 다시 풀려났지만 정부를 못믿는 백담사 쪽 분위기는 좀체 가시지 않는 모양이다.
전씨가 처남 재구속 이후 측근들에게 정치인의 자세·신의를 새삼 역설하는 것도 이런 전후사정과 무관치 않은 듯하다.
그는 일본의 정치도의와 국가에 대한 봉사 정신이 전후 복구의 힘이 됐음을 강조하며 귀감이 될 무엇을 하라고 주위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주변에서는 그가 하산해서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을 벌일 것이라며 하산이 단순한 은둔생활의 청산이 아닐 것이라고 하지만 아직 그에 대한 여론의 역풍도 없지 않다.
그는 올해 근 40만명에 가까운 방문객을 만났다. 지난 여름휴가 때와 봄 관광철엔 하루에 3천명씩 몰려왔고 백담사측에서 봉고 8대를 빌려 이들에게 무료로 교통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곧 그에 대한 동정이나 지지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의 측근도 내방객의 80%는 호기심 때문이라고 했다.
백담사의 전씨는 설악산 관광코스에 포함돼 있는 것이다.
그를 만난 사람들이 그에 대해 동정심을 갖게 됐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해 5공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난 2년간 백담사는 너무나 바뀌었다.
큰길까지의 10㎞ 산길이 포장됐고 전기가 가설됐다. 수세식 화장실도 들어섰고 비만 오면 떠내려가던 백담사 앞 통나무다리도 견고한 돌로 축조됐다.
이 다리에 전 전 대통령이 수심교로 이름짓고 글씨도 새겨 넣었다.
그가 하산하면서 이 다리를 건널 때 그의 마음가짐이 어떨는지 여러 가지 상념이 한꺼번에 떠올랐다.<백담사=김현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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