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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 치욕을 이렇게 메웠다…中서 판치는 '빨간봉투' 정체

중앙일보

입력

중국 베이징에서 일하는 40대 금융인 스티븐은 지난해 말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 그는 상태가 악화해 병원에 입원하려 했으나 병상이 없다는 이유로 여러 곳에서 퇴짜를 맞았다.

수 시간 전전한 끝에 그는 어린이병동에서 산소호흡기와 침상을 겨우 받았다. 조카가 다니는 학교의 반 친구 어머니가 병원에서 일하고 있어 '연줄'이 된 덕분이었다. 치료가 늦어져 중증 폐렴으로 20일간 입원했던 그는 "그런 관시(關係·관계, 인맥)마저 없었으면 병상을 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로이터통신에 전했다.

의료진이 2022년 12월 21일 중국 상하이 외곽의 예방접종센터를 방문해 주민에게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의료진이 2022년 12월 21일 중국 상하이 외곽의 예방접종센터를 방문해 주민에게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14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코로나19 환자가 공무원·의료종사자와 관시가 있거나 뒷돈을 줘야 병상을 얻을 만큼 의료 상황이 열악하다. 로이터는 "연줄의 직위가 병원장처럼 높고 환자와 인연이 오랠수록 치료가 더 잘 되거나 대기 순번이 빨라진다"고 전했다.

일단 병상 부족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다. 상하이 푸단(復旦)공중보건대학에 따르면 중국은 2021년 인구 10만 명당 중환자실(ICU) 병상이 4.37개에 불과하다. 2015년 기준 미국의 병상수(34.2개)와 비교하면 8분의 1 정도 수준이다.

여기에 현지 관행인 '뒷돈 주기'와 '관시 입원'이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더욱 횡행하고 있다. 중국은 10년 전 의료 개혁의 목적으로 의사들이 현금 등이 담긴 '빨간 봉투(紅包·훙바오)'를 받는 것을 금지했다. 지난해 국가보건위원회도 뇌물수수 법 집행 강화를 강조했다. 로이터통신은 "그러나 주로 제약사 리베이트만 단속할 뿐 환자가 의사에게 주는 뒷돈은 사각지대에 있다"고 전했다.

1월 19일 중국 베이징의 한 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환자들이 의료진에게 검사를 받고 있다. AP=연합뉴스

1월 19일 중국 베이징의 한 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환자들이 의료진에게 검사를 받고 있다. AP=연합뉴스

공공의료비를 낮게 책정한 중국에서 많은 의사가 만성 저임금에 시달린 구조도 뒷돈이 활개 치는 원인이 됐다. 로이터통신은 "의사들의 주 수입원은 기본급이 아니라 환자에게 받는 빨간 봉투에서 나온다"면서 "병상을 구하려 의료비의 2배인 뒷돈을 줘야 할 때도 있다"고 보도했다.

2023년 1월 21일 중국 쓰촨성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감염이 급증한 가운데 펑산구 인민병원 중환자실에서 의료진이 환자를 돌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2023년 1월 21일 중국 쓰촨성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감염이 급증한 가운데 펑산구 인민병원 중환자실에서 의료진이 환자를 돌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중국에서 일반 의사 월급은 1만 위안(약 186만 원)~1만5000위안(약 279만 원)이다. 소도시의 초보 의료진 월급은 3000위안(약 56만 원)~5000위안(93만 원) 수준이다. 중국의 한 의료인은 로이터통신에 "의사가 되기 위해 들인 노력을 생각하면 이런 급여는 치욕적이다"고 했다.

뇌물로 흔히 주는 고가의 찻잎이나 빨간 봉투는 주치의는 물론이고 주임 간호사나 브로커에게도 챙겨줘야 한다. 관시가 없는 사람들에게 관시를 만들어주는 브로커를 중국에서는 '노란 소(黃牛)'라 부른다.

코로나19 환자가 급증하던 지난해 말 중국 SNS에서는 한 브로커가 "병상을 마련해 줄 테니 4000위안(약 74만 원)~5000위안(약 93만 원)을 내라"고 요구하는 글이 올라와 논란이 됐다.

미국 뉴욕 외교협회(CFR) 황옌중 세계보건 선임연구원은 "코로나로 의료 체계에 과부하가 걸리면서 뒷돈과 관시가 더 중요해졌다"면서 "돈도 관시도 없는 시골 환자는 병원도 못 가고 집에서 사망한다"고 지적했다. 황옌중 연구원은 CNN에 "중국 농촌은 인구 1000명당 보건전문가가 5.18명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가운데)이 2023년 1월 18일 온라인 영상연결을 통해 중국 국민들에게 춘제 인사를 전하고 있다. 사진 신화통신 캡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가운데)이 2023년 1월 18일 온라인 영상연결을 통해 중국 국민들에게 춘제 인사를 전하고 있다. 사진 신화통신 캡처

미국의소리(VOA)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강력하게 추진했던 3년간의 '제로 코로나' 정책이 도시-농촌 간 보건 시스템의 격차를 더 벌렸다고 비판했다. 제로 코로나 정책 추진 기간 동안 중앙정부가 해열제·기침약·항생제 등의 유통을 통제하면서 농촌 병원과 진료소에는 의약품 부족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쓰촨성 인민병원의 한 의사는 VOA에 "농촌 병원에선 코로나 팬데믹 피크 때도 과거에 비축해둔 감기약, 해열제를 써야 했다"면서 "약품 구매는 중앙통제방식으로 이뤄져서 농촌까지 약품이 공급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VOA는 "일부 사람들은 동물병원에 있는 소·돼지·당나귀용 해열제를 구매했다"고 전했다.

시 주석이 지난달 18일 지방 간부들에게 춘제(중국 설) 맞이 안부 전화로 "마을 단위로 코로나 예방과 통제를 책임져달라"고 당부했지만, 현지 농민들은 소외됐다는 반응을 보였다. 35년간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에서 살아온 한 주민은 VOA에 "정부가 지방 농부들을 무시하고 있다"면서 "정부는 베이징과 상하이를 돌볼 수밖에 없고 농촌은 관심 밖에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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