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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적 서정성 우리와 유사-소 음악계를 돌아보고… 한명희<서울시립대 교수·음악평론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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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음악평론가 한명희 교수(서울시립대)가 지난달 하순 소련 작곡가동맹 초청으로 한국의 창악회 회원들과 10일 동안 소련에 다녀왔다. 지난9월 창악회가 소련작곡가동맹 소속 현대음악가들을 초청,「한국-소련 작품교류의 밤」과 작곡세미나를 연데 대한 답례초청 형태로 이뤄진 이 방문에서 한 교수가 직접 보고 느낀 소련음악계와 앞으로의 한 소 음악교류 문제를 알아본다. 【편집자주】
지난 10월 하순 한국의 창악회 작곡가들은 소련작곡가동맹의 공식초청으로 위대한 음악의 고향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그야말로 역사적인 첫 발을 들여놓았다. 굳이「역사적」이라는 형용사로 표현해 보는 이유는 우선 오랜 단절후의 공식문화교류라는 측면에서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이번 방 소 행사로 영근 결실은 예상외로 컸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작곡가의 작품, 즉 이영자·백병동·김정길·김용진·윤해중·이성재의 창작곡을 소련연주가들의 색다른 연주로 재현한 곳은 소련작곡가동맹 본부가 들어있는 큼직한 아파트형 건물이었다. 동맹의 회원으로 등록된 작곡가들만의 집단거처이기도 한 이「작곡가의 집」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도보로도 멀지 않은데 건물 앞에는 그야말로「쌈지공원」같은 조그마한 어린이놀이터가 있어 딱딱한 빌딩 숲의 분위기를 한층 부드럽게 상쇄해주고 있었다.
또한 연주홀·세미나실·식당 등을 내부에 갖추고 있는 이 허름한 외모의 건물 오른쪽 전면 벽에는 쇼스타코비치의 좌상이 동판에 새겨져 있고 좌측 벽에는 하차투랸의 이름이 역시 동판으로 각인 되어있어 러시아 음악의 체취가 감도는 듯한 이곳 명소의 유서를 실감 있게 웅변해주고 있었다.
서울작곡가들의 작품을 소련작곡계의 본산이랄 이 모스크바「작곡가의 집」에서 저들의 연주로 선보인다는 것은 여간 예사로운 감격이 아니었으며 연주회 뒤의 회식석상에서 저들과 오간 음악얘기들도 재미있고 유익했다.
서울대 김용진 교수와 필자의 주제발표가 끝나자 그토록 열띤 질문을 해가며 한국음악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던 것이다. 특히 한국전통음악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여간 아니어서 이제까지 이들 이방인들의 궁금증을 풀어 줄 변변한 영문책자 한권 갖추지 못한 우리네 국악계의 처지나 문화당국의 국제적 안목이 슬그머니 부끄럽기만 했다.
1865년 문을 연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은 평균 6대1의 경쟁을 뚫고 들어오는 1천5백여명의 학생과 3백여명의 교수진으로 구성되고 있는데 그 철두철미하고도 이상적인 교육내용은 이 학교가 지니는 세계적인 명성의 배면을 십분 이해하고 수긍하기에 족했다.
지구촌 곳곳에서 모여든2백명 이상의 유학생이 공부하고 있으며 미국의 줄리어드음악원 등 세계의 유수한 음악기관과 밀접한 교류협약을 맺고 있는 명문 모스크바음악원, 통칭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이 이번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이남수 학장과의 회동에서 학생·교수·작품 및 연주활동의 상호교류를 서둘러 체결했다는 것은 실로 한국 음악계의 커다란 변화를 예시하는 중요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대학간의 교류계획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모스크바 음악원과 함께 소련의 음악계를 이끌어 온 쌍두마차의 하나로서 이보다 4년 앞선 1862년에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이름으로 창설된 레닌그라드컨서버토리를 방문했을 때도 이 같은 문제를 깊숙히 협의하고 약속했던 것이다.
학교차원의 유대 외에 현역 작곡가들간의 구체적인 교류계획이 다채롭게 논의되었음도 물론이다.
현역 국회의원이자 작곡가동맹 회장인 흐르넨체코와의 면담에서도 양국간음악교류의 실천적 중요성이 강조되고 특히 서울의 창악회와 소련작곡가동맹과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재확인했다. 또 레닌그라드의 작곡가들과는 당장 내년부터 서울에서는「레닌그라드의 밤」을, 그리고 저쪽에서는 가칭「서울의 밤」을 기획해 양국작곡가들의 작품만으로 연주회를 꾸미기로 합의했다.
소련의 저명한 음악평론가인 마야 프리처는 러시아 음악의 남다른 특성으로 북구 특유의 끈끈한 서정성과 심오한 철학적 내용을 꼽고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여기 러시아적인 서정성이란 우리의 정서와도 그렇게 맞아 떨어질 수가 없다. 굳이 우리의 언어인 우랄알타이어 계열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러시아의 음악을 통해 환기되는 우리네 정서대는 확실히 저들의 그것과 상통되는 바가 많다.
이처럼 음악예술의 정서적 동질성이 각별함에도 그 동안 우리는 20세기적 시대상황으로 인해 박제된 음악만을 간접화법으로 접해왔을 뿐 저들의 풍토 속에서 저들의 생 음악을 우리의 오관으로 몸소 체험해볼 기회는 불행히도 없었다. 바로 이 같은 상황을 감안하거나 혹은 앞으로 한 소 양국간의 활발한 음악적 교류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번 한국작곡가들의 방소 활동은 자못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주지하다시피 작금의 세계음악조류는 새로운 사조, 새로운 지평을 모색하며 갈등하고 있다. 마치 거대한 용암층이 분출구를 찾아 용트림하듯 유럽과 미주의 음악적 한계성을 극복해보려는 욕구가 절실하다. 모스크바의「작곡가의 집」에서도, 레닌그라드음악원 에서도, 그리고 볼쇼이극장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를 보고 레닌그라드의 키로프 극장에서『라트라비아타』를 보면서도 자꾸 이 같은 시대적 진운이 되 뇌여 졌다.
그것은 러시아의 음악적 잠재력이야말로 다가오는 세기의 음악적 조류가 용출해갈 광활한 신천지임이 직감되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러시아 음악권에 눈을 돌리고 아시아적인 음악사조의 형성에 관심을 두어야할 예술사적 전환기를 우리는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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