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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버림받은 예산…"여야 둘다 극단 지지층만 챙긴다" [현장에서]

중앙일보

입력

국민의힘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 주호영 원내대표와 의원들이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해임처리안 강행 처리 반대 등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의힘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 주호영 원내대표와 의원들이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해임처리안 강행 처리 반대 등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한때 국회에서는 제야의 종이 울리는 12월 31일 자정쯤에 국회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리는 장면이 잦았다. 해가 바뀌는 순간까지 여야가 예산안 처리를 놓고 마라톤협상을 벌이다 보니 생긴 풍경이었다. 예산안 처리가 법정 시한을 넘기기 일쑤고, '동물국회'라 불릴 정도로 예산과 법안을 둘러싼 정치인들의 육탄전이 빈번하자 여야는 2014년 5월 국회법을 개정했다. 예산안과 부수 법안에 대해 그 해 11월 30일까지 심사를 마무리하지 못하면 그다음 날 곧장 본회의에 부의하는 취지의 조항을 신설한 것이다.

개정 첫해 예산 심의 기간인 2014년 말, 당시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의 이완구·우윤근 원내대표는 법정 시한을 지키기 위해 국회에서 짜장면을 배달시켜 먹으며 협상을 벌였다. 이후부터 국회는 갖은 우여곡절 속에도 정기 국회 내에 예산안을 처리해왔다. 이른바 ‘국회선진화법’ 도입 이후 바뀐 풍경이다.

하지만 올해, 8년간의 새 질서가 깨졌다.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지난 9일, 여야의 예산안 협상은 무산됐다. 예산을 줄이고 늘리는 과정에서 이해관계가 얽히며 힘겨루기가 벌어진 끝에 결렬된 것이다. 명분은 예산안 감액 규모와 법인세 인하 문제였다. 국민의힘은 기존 정부안(전체 639조원)에서 최대 3조원만 감액하자는 반면 민주당은 5조원은 줄여야 한다고 맞섰다. 국민의힘은 외자 유치를 위해 법인세 최고세율을 인하하자고 했지만, 민주당은 “초부자 감세”라며 수용 불가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정치권에선 예산안 처리가 늦춰진 진짜 이유를 3·9 대선 이후 이어진 양당의 극단적 대치 상황에서 찾는다.

여권은 야당의 예산안 반대가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막기 위한 방탄 전략”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이 11일 의원총회에서 “9일 정기국회가 끝났는데 하루도 여유 주지 않고 회기를 연장하는 이유가 뭐겠냐. 이 대표 체포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 아니겠냐”고 한 발언이 대표적이다.

이 대표의 측근인 정진상 전 민주당 대표 정무조정실장 등이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기소 되며 이 대표에 대한 수사 가능성이 커지는 상황이다. 하지만 줄곧 “정치 탄압”을 주장해 온 이 대표는 검찰의 출석 요구에 불응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체포영장이 발부돼야 하는데, 회기 중에 현역 의원을 체포하려면 국회 본회의에서 체포동의안이 가결돼야 한다. 정진석 위원장이 다수당인 민주당이 체포동의안을 부결시키려 시간을 끌고 있다고 보는 이유다.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에 대해서도 "정쟁에 몰두하느라 민생을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례로 지난 8일 국회 본회의에선 소관 상임위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됐던 한전법 개정안이 부결됐다. 여당인 국민의힘 의원 57명이 결석한 상태에서 재석 204명 중 찬성 90표, 반대 61표, 기권 53표가 나온 것이다. 불참 의원 중에는 장제원·윤한홍·박성민·이용 의원 등 친윤 핵심들과 김기현·안철수·윤상현 의원 등 당권 주자들도 있었다. 이번 부결로 한전은 회사채 발행 없이 전력 대금을 결제하고, 한도가 초과한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내년 1분기 중 전기료를 인상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 부닥치게 됐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이에 대해 책임을 지는 말 한마디 없다.

정쟁에 갇혀 정기국회 내 예산안을 처리해온 '8년의 좋은 관행'이 깨지게 된 것과 관련해 여당의 한 중진 의원은 “이번 예산안에 있어 법인세 등의 문제만 제외하면 대부분 합의점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정치력을 발휘하면 될 일이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야 모두) 극단적인 지지층만 바라보고 정쟁에 치우친 나머지 어려운 민생을 외면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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