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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중단합니다"…근로자 스스로 안전챙기는 '작업중지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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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현장에서 근로자들의 작업중지권 활용을 독려하기 위해 내건 대형 현수막. 삼성물산

공사 현장에서 근로자들의 작업중지권 활용을 독려하기 위해 내건 대형 현수막. 삼성물산

21일 오전 7시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리모델링 현장. 삼성물산이 공사를 하고 있는 이 현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출입구 앞에 붙어있는 QR코드였다. 스마트폰으로 이 QR코드에 접속해 안전 관련 영상 교육자료를 시청한 뒤에야 현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출입구를 통과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곳도 안전교육장이었다. 현장 이동로 곳곳에는 안전 수칙과 구호가 적힌 현수막과 유인물이 부착돼 있었다. "안전이 경영의 제1원칙"이라는 삼성물산의 경영 철학을 엿볼 수 있었다.

이날 오전 이 현장에서는 작업중지권 활용 우수자에 대한 시상식이 진행됐다. 작업중지권은 근로자가 위험을 감지해 안전 조치가 이뤄질 때까지 스스로 작업을 중지할 수 있는, 산업안전보건법 52조에서 보장하는 현장 근로자의 기본 권리다. 삼성물산은 지난해 3월 근로자의 작업중지권을 전면적으로 보장하는 작업중지권리 선포식을 했다.

 심재광(가운데 오른쪽) 삼성서울병원 리모델링 현장소장이 지난달 작업중지권 활용 우수자에게 시상하고 있다. 삼성물산

심재광(가운데 오른쪽) 삼성서울병원 리모델링 현장소장이 지난달 작업중지권 활용 우수자에게 시상하고 있다. 삼성물산

작업중지권은 법에 명시된 근로자의 기본 권리지만, 현장에서는 활용에 소극적이었다. 작업을 중단한 만큼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인식이 컸기 때문이다. 삼성물산은 지난해 작업중지권을 전면 보장하면서 이런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실질적인 보상과 포상 제도를 도입했다. 근로자의 작업중지권 행사로 공사가 중단되고 차질이 빚어질 경우 협력회사에 대해 손실을 보전해주기로 하고 이를 공사계약에 반영하고 있다. 또 현장 위험요소를 사전에 발굴하고 제거하는 데 적극 참여한 근로자에게는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삼성물산이 작업중지권을 현장 안전관리의 주요 방법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지난해 3월부터 지난 8월까지 1년 6개월 동안 국내외 103여개 현장에서 총 1만1670건(월평균 648건)의 작업중지권이 사용됐다. 하루 600여명의 기술인력이 모이는 삼성서울병원 리모델링 현장에서는 지난 9월 한 달 동안 총 27건의 작업중지권이 사용됐다. 적재된 건설자재의 돌출 부위에 찔림 위험 등을 근로자가 먼저 파악해 조치를 취했다. 이 현장에서도 작업중지권 활용을 독려하기 위해 매월 시상식을 열고 있는데, 근로자들의 만족도가 높다.

협력업체 근로자인 김주완씨는 지난 분기 우수사례 시상식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현장에서 사용 중인 장비의 벨트 커버가 떨어진 것을 확인한 뒤 작업중지권을 활용해 조치에 나서 사고위험을 예방했다는 점을 높게 평가받았다. 시상식에서 그는 50만원 상당의 한우선물세트도 받았다. 김씨는 "과거에는 안전보다 주어진 일을 빨리 처리하는 게 먼저라는 인식이 강했다"며 "작업중지권에 대해 알게 되면서 내 주변의 위험 요소를 세심하게 관찰하게 됐고, 나와 내 동료의 안전이 먼저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삼성물산이 시공하는 삼성서울병원 리모델링 현장에서는 작업중지권 제보 우수사례를 현수막으로 제작해 작업장 곳곳에 걸어놨다. 삼성물산

삼성물산이 시공하는 삼성서울병원 리모델링 현장에서는 작업중지권 제보 우수사례를 현수막으로 제작해 작업장 곳곳에 걸어놨다. 삼성물산

삼성물산 현장 근로자들은 위험 요소를 발견하면 현장 특성에 맞게 구축된 모바일 메신저와 전용 애플리케이션, 핫라인 등 신고 플랫폼을 활용해 작업중지권을 사용한다. 작업중지권이 일종의 위험 알림 신호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현장의 긴급안전조치팀에서 신고를 받고 즉각 조치하는 시스템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근로자가 직접 조치에 나서기도 한다.

심재광 삼성서울병원 리모델링 현장소장은 "그동안 현장 사고 예방을 위해 안전 교육, 안전 설비 강화 등을 꾸준히 진행해도 사고가 획기적으로 줄지 않았다"며 "회사가 작업중지권 활용을 적극적으로 독려하고 여기에 적절한 보상이 더해지면서 근로자 스스로 안전을 챙겨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졌고 실제 안전사고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삼성물산이 이달 초 현장 근로자 1000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20.4%(204명)가 작업중지권을 한 차례 이상 사용한 경험이 있으며, 이 중 182명(89.2%)이 제도 시행 이후 안전의식이 향상됐다고 응답했다. 또 전체 응답자의 67.8%(678명)는 "작업중지권이 안전한 작업현장을 만들고 있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다른 건설사와 비교해 차별화하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도 60.2%(602명)였다.

작업중지권 포스터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삼성물산 현장 근로자들. 삼성물산

작업중지권 포스터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삼성물산 현장 근로자들. 삼성물산

삼성물산은 올해 안전·보건담당 조직을 대폭 확대했다. 우선 종전 2개 팀이던 안전환경실을 안전보건실로 확대하고 산하에 안전보건 정책팀·운영팀·지원팀, 환경팀, 3개 사업부별 안전보건팀 등 총 7개 팀으로 늘렸다. 안전을 전담 연구하는 조직인 건설안전연구소와 안전보건자문위원회 등도 신설했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산업안전보건법이 규정하고 있는 '급박한 위험'이 아니더라도 근로자가 안전하지 않은 환경이나 상황이라고 판단할 경우 작업중지권을 쉽게 행사할 수 있도록 포괄적으로 적용해 나갈 계획"이라며 "근로자의 작업중지권 보장 외에도 제도와 시스템을 개선해 현장의 안전·환경 수준을 높여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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