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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엄마·아빠·동생들까지 "우리는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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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마흐말바프가(家)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 가족이다. 지난해 '칸다하르'로 국내 관객과 만난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을 위시해 아내와 큰딸.막내딸은 연출을, 아들은 촬영을 하는 등 가족 전원이 영화 일을 한다.

지난달 31일 서울 광화문 씨네큐브(02-2002-7770)에서 시작된 '한지붕 세가족의 씨네 릴레이'는 엄마인 마르지예 메시키니의 '내가 여자가 된 날'을 비롯해 큰딸 사미라 마흐말바프의 '칠판'(14일 개봉), 아버지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사랑의 시간'(28일) 등 세 편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자리다. 이들 가족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인 김지석씨를 통해 들어본다. [편집자]

지난 1월 이란 테헤란에서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을 만났다. 헤어질 때 그는 "부인과 아들, 그리고 작고하신 당신 어머님 영혼에 내 인사를 전해주시오"라고 말했다. 그가 내 어머니를 만난 건 2000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왔을 때 딱 한 번이었다. 그런데도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영혼에 인사를 건네는 마음 씀씀이에서 그가 삶을 바라보는 자세와 영화관(觀)을 재확인 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경찰에 테러를 가할 정도로 열혈 청년이었다. 그러나 민주화에 대한 신념은 투옥을 거치면서 '문화야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진정한 힘'이라는 자각으로 바뀌었다. 그는 출옥 후 극작가.시인.소설가.감독 등으로 다양한 창작 활동을 펼치게 된다. 그의 영화 스타일은 흐르는 물처럼 늘 변하지만 영화 속 주제는 변함이 없다. 바로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관심과 배려다.

나이와 성별.지위 고하에 상관 없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이웃에 대한 자그마한 관심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근본적인 힘이 된다는 믿음은 그의 영화뿐 아니라 삶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큰딸 사미라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다니던 중학교를 자퇴하겠다고 했을 때도 그는 딸의 의견을 존중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칸다하르'를 촬영할 때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난민들을 보고는 한 달간 제작을 중단하고 제작비를 털어 난민구호 활동을 펴기도 했다. 그가 '칸다하르'를 만든 목적은 기아로 죽어가는 아프가니스탄인들에 대한 지구촌의 관심과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바로 눈 앞에서 난민들이 죽어가자 그는 영화 만들기를 일시 포기했다.

한 인간으로서 그의 위대함은 그 다음에 발휘된다. 아프가니스탄인을 도와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는 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았다. 단순히 구호물품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린이를 교육하는 것, 아프가니스탄의 문화를 일으켜 세우는 일이야말로 장기적으로 꼭 필요한 활동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아프가니스탄 어린이 교육운동과 아프가니스탄 영화 제작에 힘을 보태고 있다.

그의 자유롭고 열린 정신은 나눔의 정신으로도 이어진다. 영화에 대한 열정을 가진 이에겐 기꺼이 자신의 재능을 나눠준다. 그의 집에 둥지를 튼 '마흐말바프 영화학교'는 이런 취지로 세워졌다. 여기에선 상하 구분이 없다.

아내 마르지예는 '내가 여자가 된 날'로 감독이 됐지만 큰딸 사미라가 감독한 '칠판'에서는 조감독을 맡았다. 사미라는 다시 마르지예의 다음 작품에서 조감독을 맡기로 약속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건 마흐말바프가 자신의 재능을 나누어 주는 일에만 열중한 나머지 최근 들어 정작 자신의 작품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단지 '위대한 인간'이 아니다. 감독으로서도 영화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인물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가 1996년에 만든 '순수의 순간'을 세계 영화 사상 가장 뛰어난 걸작 10위안에 꼽는다.

이번 '한지붕 세 감독의 씨네 릴레이'는 이들의 가풍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엄마 마르지예 메시키니의 '내가 여자가 된 날'은 이슬람 여성의 삶을 연령대별로 세 개의 에피소드 속에 압축한 작품이다. 복잡다단한 여성 억압의 문제를 아주 간결하게 풀어내되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장녀 사미라의 '칠판'은 이란과 이라크 국경 지대에서 소외당한 채 고난의 삶을 이어가는 쿠르드족에 관한 이야기. 이 영화 역시 작품을 위해서라면 온갖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 마흐말바프가의 '발로 뛰는 제작방식'을 따르고 있다.

가장(家長)인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사랑의 시간'은 '사랑과 배신'이라는 주제를 각기 다른 사람의 시점과 상황을 통해 풀어낸다.

이들 가족은 영화가 세상을 바꾸는 도구가 되기를 꿈꾼다. 또 제작 방식과 영화 문법 등 기존의 영화적 관습을 바꾸는 데서도 혁신적인 일을 해내고 있다. 세 편의 영화를 통해 관객들은 이 점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 김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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