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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꼭 숨기고픈 비경, 경주 보문들판…2가지 없어, 더 특별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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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보문들판의 가을날 풍경. 해마다 10월 중순에서 하순까지 펼쳐지는 장관이다. 누렇게 익은 논과 논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흙길. 무엇보다 들판에 전봇대가 없다. 멀리 진평왕릉이 보인다. 10월 13일 아침에 촬영했다.

경주 보문들판의 가을날 풍경. 해마다 10월 중순에서 하순까지 펼쳐지는 장관이다. 누렇게 익은 논과 논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흙길. 무엇보다 들판에 전봇대가 없다. 멀리 진평왕릉이 보인다. 10월 13일 아침에 촬영했다.

강산이 물들고 있다. 중부 지방까지 내려온 단풍이 이내 전국을 뒤덮을 기세다. 단풍은 한번 탄력을 받으면 눈 깜짝할 사이 세상을 점령한다. 울긋불긋 타오르던 강산이 어느 날 불쑥 색깔을 내려놓을 때, 가을은 비로소 소멸한다. 단풍이 절정이라는 말은, 역설적이게도 가을이 끝나간다는 뜻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가을은 찰나의 것이다.

단풍이 절정으로 치달을 즈음, 가뭇없이 사라지는 가을 풍경이 있다. 이를테면 황금 들녘 같은 풍광이다. 누렇게 일렁이는 들판처럼 가을을 상징하는 장면도 없는데, 가을 풍경은 시차를 두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법이어서 황금 들판과 단풍 수목은 좀처럼 병행하지 않는다. 화려하지만 허무한 단풍을 쫓다 문득 넉넉한 가을 풍경이 그리워 남쪽으로 달려갔다. 경북 경주시 외곽 적적한 들판에, 꼭꼭 숨겨두었다가 몰래 꺼내보고 싶은 우리네 어릴 적 가을이 숨어 있어서였다.

가을날의 미장센

10월 13일 드론으로 내려다본 경주 보문들판. 보문들판의 논은 10월 말에 벤다.

10월 13일 드론으로 내려다본 경주 보문들판. 보문들판의 논은 10월 말에 벤다.

언뜻 보면 흔한 농촌 풍경이다. 누렇게 익은 논 사이로 남녀가 길을 걷는 장면. 그러나 이 풍경은 여느 가을 풍경과 격이 다르다. 요즘엔 어지간한 시골 농로도 시멘트 포장을 한다. 적당히 굽은 곡선도 잘 보이지 않는다. 경지 정리를 마친 논밭은 대부분 네모 반듯하다. 사진에서처럼 논과 논 사이의 굽고 휜 흙길은 이제 까마득한 옛 풍경이 되고 말았다. 이 장면이 각별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이 넓디넓은 들판에 전봇대가 없다. 천년고도 경주의 들판이어서 가능한 미장센이다. 시야에 들어오는 들녘 대부분이 문화재 보호구역이다. 함부로 무엇을 심거나 세울 수 없다.

진평왕릉. 보문들판이 끝나는 작고 낮은 숲에 있다. 한 경주 시민이 캠핑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지극히 경주다운 풍경이다.

진평왕릉. 보문들판이 끝나는 작고 낮은 숲에 있다. 한 경주 시민이 캠핑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지극히 경주다운 풍경이다.

이 황금 들녘의 이름은 보문들판이다. 정확히 말하면 서쪽 낭산(99m)에서 동쪽 명활산(266m) 사이 평야다. 경주의 들판이어서 이 들판을 걷는 건 천년 세월을 거슬러 오르는 역사기행일 수밖에 없다. 들녘 사잇길이 끝나는 자리에 작고 낮은 숲이 보인다. 이 숲에 진평왕릉이 자리한다. 진평왕(?~632)이 누구인가. 13세 나이로 왕에 올라 무려 54년을 통치했던 신라 제26대 왕이다. 진평왕의 딸도 우리는 잘 안다. 그의 딸이 덕만, 그러니까 선덕여왕(?~647)이다. 선덕여왕은 보문들판 내다보는 낭산 솔숲 오른쪽 끝에 누워 있다. 다시 말해 황금 들녘의 저 흙길은 1500년 전의 아버지와 딸을 잇는 길이다.

낭산 왼쪽 끄트머리 벌판에 서 있는 황복사지 삼층석탑. 보문들판 너머로 명활산이 내다보인다.

낭산 왼쪽 끄트머리 벌판에 서 있는 황복사지 삼층석탑. 보문들판 너머로 명활산이 내다보인다.

낭산 왼쪽 들판 끄트머리에 잘 생긴 삼층석탑이 서 있다.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는 꼴이 초라해 보이지만, 엄연한 국보다. 국보 제37호 황복사지 삼층석탑. 흔적 하나 남은 것 없어도 황복사는 매우 중요한 사찰이다. 이 절에서 신라 국사 의상대사가 출가했다. 저 들판을 파면 의상대사가 쓰던 발우가 나올지도 모른다.

삼층석탑 옆에 서면 진평왕릉 뒤로 늘어선 명활산이 훤히 보인다. 명활산에도 익숙한 역사가 깃들여 있다. 선덕여왕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던 비담(∼647)이 저 산에 진을 치고 신라군과 싸웠다. 이때 신라군을 이끌어 반란을 진압한 인물이 김유신(595~673)이다. 『삼국사기』에 다음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비담의 반란군과 김유신의 신라군이 전투 중이던 어느 날, 신라 왕궁 월성에 큰 별이 떨어졌다. 선덕여왕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고 해석할 수 있는 사건으로, 신라군에는 불길한 징조였다. 아니나 다를까 반란군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때 김유신이 꾀를 냈다. 대형 연을 만들어 불을 붙인 뒤 하늘로 띄웠다. 땅에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꾸민 것이다. 김유신이 불붙인 연을 띄워 명활산에 숨은 반란군의 기를 꺾은 자리가 여기 보문들판이다.

어떠신가. 경주에는 무연히 벼 익는 들판에도 이렇게 많은 사연이 쟁여 있다. 어쩌면 진짜 경주는 이 들판에 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풍경에서 길어 올리는 천 년의 이야기들. 보문들녘의 논은 10월 말에, 그러니까 단풍이 경주에 상륙하기 전에 벤다. 며칠 안 남았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경주 가을 명소

경주는 단풍도 곱다. 특히 불국사 단풍은 전국 절집 단풍 중에서 곱기로 손에 꼽힌다. 석굴암에서 불국사까지 내려오는 숲길은 아예 거대한 단풍 터널을 이룬다. 그러나 아직 철이 이르다. 경주의 단풍은 11월이 돼야 절정에 다다른다. 단풍이 없어도 경주의 가을은 환하다. 보문들판이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이즈음,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경주 명소 몇 곳을 나열한다.

첨성대 주변에 조성된 핑크뮬리 군락지는 가을 경주를 대표하는 풍경이다. 온종일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첨성대 주변에 조성된 핑크뮬리 군락지는 가을 경주를 대표하는 풍경이다. 온종일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우선 첨성대. 1년 열두 달, 그리고 온종일 관광객이 붐비는 경주 제일의 명소는 가을에도 인파로 몸살을 앓는다. 첨성대 주변에 조성한 핑크뮬리 때문이다. 첨성대 핑크뮬리는, 최근 전국의 가을 풍경을 점령하다시피 한 핑크뮬리 군락지의 원조다. 2017년 첨성대 주변에 핑크뮬리를 심은 뒤로 전국 지자체가 앞다퉈 핑크뮬리를 심고 있다. 해가 이운 오전이나 오후 시간 역광으로 촬영하면 핑크뮬리의 분홍색이 더 빛을 발한다.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 경북천년숲정원에 조성된 칠엽수 가로수길. 10월 13일 촬영했는데 벌써 잎이 누렇게 익었다.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 경북천년숲정원에 조성된 칠엽수 가로수길. 10월 13일 촬영했는데 벌써 잎이 누렇게 익었다.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은 최근 SNS를 통해 뜬 신흥 명소다. 경주에서 신라와 전혀 상관없는 유일한 가을 명소라 할 수 있다. 경상북도에서 운영하는 산림환경연구원 곳곳에 가을 정취 그윽한 비경이 숨어있다. ‘경북천년숲정원’으로 조성 중인 연구원 쪽의 칠엽수 가로수길이 인증사진 명소다. 10월 13일 이미 잎이 노랗게 물들었다. 10월이 지나면 나무가 빨갛게 불탄다. 태풍 힌남노로 피해를 당해 산림환경연구원 내부 출입을 제한한다. 예전처럼 구석구석 다닐 수는 없지만, 입구에서 가로수길을 촬영할 수는 있다.

왕릉 주변에 억새가 핀 성덕대왕릉. 외딴 곳에 있어 인적이 없다.

왕릉 주변에 억새가 핀 성덕대왕릉. 외딴 곳에 있어 인적이 없다.

황룡사지 구석에 조성된 코스모스 군락지. 코스모스 너머로 분황사가 보인다.

황룡사지 구석에 조성된 코스모스 군락지. 코스모스 너머로 분황사가 보인다.

경주에도 억새 명소가 있다. 보문관광단지 뒤편 무장사지의 억새 평원이 유명한데, 이곳 역시 태풍 힌남노로 진입로가 폐쇄됐다. 대신 송득곤(65) 신라문화원 향토문화해설사가 성덕대왕릉 주변 억새밭을 추천해줬다. 억새밭이 크지는 않았지만, 가을 분위기는 느낄 수 있었다. 성덕대왕릉은 관광객이 전혀 찾지 않는 외딴 왕릉이다. 하나 가치와 의미는 무시할 수 없다. 성덕왕은 몰라도 성덕왕의 이름을 딴 종은 잘 알고 있어서다. 에밀레종으로도 불리는 성덕대왕신종의 주인공이 성덕왕이다. 황룡사지 구석에 조성된 코스모스 군락지도 이달 말까지는 피어있을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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