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결국 남북간에 체결된 9ㆍ19 군사합의를 위반한 도발까지 감행했다. 외교가에선 문재인 정부 때 체결된 9ㆍ19 군사합의가 파기 수순을 밟게된 게 아니냐는 관측과 함께, 의도적으로 군사적 임계치인 ‘레드라인’을 넘나드는 북한의 의도에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가 동시에 제기된다.
북한은 13일 오후 10시 30분쯤부터 14일 오전 0시 20분까지 군용기 10여대를 동원해 동ㆍ서 내륙 지역과 서해 북방한계선(NLL)의 전술조치선을 넘어 위협 비행을 했다. 전술조치선은 군사분계선(MDL)과 NLL 북쪽 20~50㎞에 설정한 선으로, 북한 군용기가 이를 넘으면 군이 전투기로 대응하도록 돼 있는 일종의 군사적 저지선이다.
북한 군용기가 이 선을 침범한 건 2012년 10월 이후 10년만이다. 저지선을 돌파한 북한의 공군 전력은 ‘9ㆍ19 군사분야 남북합의서’에서 설정한 ‘비행금지구역’ 5km 지점까지 접근 비행했다.
더 과감한 도발은 위협비행 직후 발생했다. 합참에 따르면 북한은 14일 오전 1시 20분부터 황해남도 용연군 마장동 일대에서 서해를 향해 130여발, 오전 2시 57분부터는 강원도 고성군 구읍리 일대에서 동해를 향해 40여발의 방사포를 발사했다. 이어 이날 오후 5시부터 강원도 장전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80여 발의 포병 사격을 했다. 오후 5시 20분쯤부터는 서해 해주만 일대에서 장산곶 일대까지 포성과 함께 해상에서 물기둥이 관측됐다.
북한이 쏜 포탄 중 다수는 9ㆍ19 합의로 포사격이 금지된 해상완충구역에 떨어졌다. 동ㆍ서해를 향한 연쇄 도발 사이인 오전 1시 49분경엔 평양 순안에서 단거리탄도미사일(SRBM)까지 발사했다.
2018년 평양에서 9ㆍ19합의가 체결된 뒤 북한이 이를 어긴 건 2020년 5월 중부전선 비무장지대 감시초소(GP)에 수발의 총탄을 발사한 이후 2년 5개월만이다. 특히 우발적 사건에 가깝던 당시와 달리 이번엔 의도적인 위협비행과 동ㆍ서해를 연쇄 겨냥한 대규모 포격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는 분석이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 청사 출근길에 북한의 도발에 대한 질문을 받자 “남북 9ㆍ19 군사합의 위반”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하나하나 저희도 다 검토하고 있다”며 전임 정부 때 체결된 9ㆍ19 군사합의의 효용성 등을 검토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김성한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열린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도 북한의 이번 도발에 대해 “9ㆍ19 군사합의를 위반해 해상완충구역 내에서 포사격을 감행하고, 위협 비행과 탄도미사일 불법 발사 등 적대행위를 통해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킨 것을 규탄한다”는 입장을 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9ㆍ19 합의 자체를 무시하는 듯한 도발을 감행한 의도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영태 동양대 석좌교수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북한이 핵ㆍ미사일 도발을 이어가는 상황에서 9ㆍ19합의는 이미 의미가 없어졌음에도 남북 누구도 명시적 ‘파기 선언’을 하지는 않았다”며 “9ㆍ19합의를 의도적으로 위반한 이번 도발은 한국 정부가 먼저 남북간 합의를 파기하도록 유도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북한은 무차별적 도발을 감행하면서도 자신들의 불법적 도발에 대해선 “한ㆍ미 훈련 등에 대한 대응”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만약 한국이 9ㆍ19합의에 대한 선제적 파기 선언을 할 경우 북한은 한반도 긴장 고조의 책임을 한국과 미국쪽에 노골적으로 전가하면서 핵기술 고도화에 대한 명분으로 활용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특히 현재 정치권을 중심으로는 이미 “한반도 비핵화 선언과 9ㆍ19 합의의 지속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주장이 구체화되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내 여론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해 온 북한이 안보사안에 대한 ‘남남갈등’을 증폭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기존 합의안을 무시한 도발을 감행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와 관련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정치권에서의 과도한 논란은 북한의 의도에 말려드는 빌미가 될 수도 있다”며 “북한은 결국 언젠가 진행될 가능성이 있는 미국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주도권을 쥐고 한ㆍ미에 끌려가지 않겠다는 장기적 포석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