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과소비 추방운동 시비 말라(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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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과소비 추방운동을 중지해야 한다는 미국 조야의 잇따른 요구와 압력에 접하면서 우리는 역사나 문화적 배경이 다른 국민 사이의 인식격차를 좁힌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개방화ㆍ국제화라는 도도한 시대적 요구와 흐름을 수용하는 것은 불가피하며 당연하다 치더라도 그것이 한 나라 국민이 소중히 여겨온 도덕적 가치나 미덕마저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하는 근본적 의문에 부닥치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범국민적으로 벌이고 있는 과소비추방운동이 단순히 외국상품의 수입을 줄여보자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분수에 맞지 않게 사치와 낭비를 일삼는 그릇된 풍조를 바로잡고 근검절약하는 건실한 전통적 기풍을 되살리자는 도덕성 회복에 그 근거와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조야에서도 잘 인지하다시피 지금 우리 사회는 86년부터의 국제수지 흑자전환과 88년의 올림픽 개최,86∼88년 3년간의 연속 12%가 넘는 고속성장 등으로 마치 우리가 선진권에라도 진입한 듯한 환상과 착각에 빠져 있으며 이같은 착각이 국민의 소비수준을 실력 이상으로 끌어올려 이른바 과소비풍조라는 비정상적인 사회현상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언론들이 우리의 이같은 소비행태를 가리켜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느니,「외화내빈」이니 하고 조롱하고 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다.
이같은 현상이 경제적으로 저축률을 떨어뜨려 국내투자에 필요한 재원을 다시 외국에 의존토록 함으로써 감소추세의 외채를 다시 증가세로 반전시키고 있음도 충격이지만 우리 국민들이 더욱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 소비행태의 확산에서 비롯되는 도덕성의 후퇴다.
잘 알려진 일이지만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근검절약과 함께 이웃과 고통을 나누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왔다. 이때문에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부자라도 스스로 생활수준을 낮추고 소비를 자제함으로써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호흡과 보조를 같이했던 것이다. 이같은 보편적 국민의식의 이 사회를 공동운명체로 단합시키는 강한 끈의 역할을 해왔으며 어쩌면 미국을 단기간내에 신흥공업국으로 끌어올린 원동력의 하나도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여론이 있는 자에 대해 민감한 비판의식을 보이는 것은 이같은 보편적 국민의식의 반증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사회에 일고 있는 과소비풍조는 있는 자의 과시욕이 가난한 이웃을 자극,실력 이상의 소비생활을 유발하는가 하면 소비경쟁의 질시와 반목을 유발,사회적 갈등으로까지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 국민들이 이같은 현상에 스스로 위기감을 느끼고 과소비풍조를 자제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은 공동체의 방어본능에서 비롯된 것인 동시에 무너져가는 전통가치관의 재정립움직임이라 보는 것이 마땅하다.
미국은 지난 6월 미국을 방문한 한국구매사절단에 대해 과소비풍조의 중지를 요청한 데 이어 11월3일 주한 미 상공회의소를 통해,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한미금융정책회의 참석을 계기로 한국정부에 대해 계속 과소비추방운동의 중지를 요구해오고 있다.
그리고 그 주장의 핵심은 과소비추방운동이 외국상품의 수입을 규제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으로 일관되고 있다.
물론 우리의 과소비풍조가 결과적으로 외국상품 수입에 다소간 제약요인이 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닐 터다.
그러나 그 목적이 미국 조야가 주장하는 대로 국내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상업적 차원에 있지 않음을 미국은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과소비추방운동이 외제배격보다는 소비절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미국 국내에서 일고 있는 「바이 아메리칸」운동(미국제 물건사기 이용)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동시에 자체에 배타적 성격이 더 강한 「바이 아메리칸」운동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미측에 묻고 싶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만연되고 있는 무절제한 과소비풍조를 방치하는 경우 그것은 이 사회의 도덕적 기반을 흔드는 일이 될 뿐 아니라 이미 일기 시작한 있는 자와 없는 자간의 갈등의 골을 깊게 해 한국과 미국이 똑같이 소중한 가치로 여기고 있는 자유경제체제에 대한 위협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미국은 이해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를 스스로도 과소비풍조가 내포하는 문제점을 깊이 인식,일상생활에서 분수와 절제를 지키는 한편 이 운동이 관주도라는 엉뚱한 오해로 무역마찰을 증폭시키는 일이 없도록 지혜롭게 처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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