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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보고 옛 친구에게 연락해볼까 생각든다면 성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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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8일 개봉하는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을 공동연출한 임지선(왼쪽), 이재은 감독.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 경쟁부문대상을 받는 등 호평받고 있다. 임 감독은 “친구 관계라는 공감받을 수밖에 없는 소재 덕분”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8일 개봉하는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을 공동연출한 임지선(왼쪽), 이재은 감독.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 경쟁부문대상을 받는 등 호평받고 있다. 임 감독은 “친구 관계라는 공감받을 수밖에 없는 소재 덕분”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스스로가 좀스럽게 느껴져 차마 말로 꺼내놓기 어려운 감정이 있다. 이를테면 내 마음의 크기만큼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 친구를 향한 서운함 같은 감정이 그렇다. 너무 좋아해서 가끔 미웠고, 누구보다 가까웠지만 한순간 멀게 느껴져 더 큰 헛헛함을 안겨주었던 스무 살 무렵의 관계들. 8일 개봉하는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은 누구나 경험해봤지만, 널리 다뤄진 적 없던 친구 관계의 미묘한 정서를 섬세하면서도 명료하게 포착해낸다.

고3 시절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정희(김주아)와 민영(윤아정)이 스무 살이 된 후 각자의 길을 걷게 되고, 오랜만에 함께 보낸 어느 하룻밤 사이 미묘한 균열을 겪게 된다는 게 줄거리다. 극적인 사건도 없지만, 잔잔히 삐걱거리는 이들 사이는 웃음을 자아내다가도 이내 관객의 기억 속 누군가를 곱씹게 한다.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한국경쟁 대상 등 각종 수상 이력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분명 ‘성적표의 김민영’은 올해 가장 돋보이는 독립영화 중 하나다.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만난 이재은(29), 임지선(30) 감독은 “얼떨떨하다”(임지선), “영화제를 하도 많이 돌아서 더 보실 분들이 있을까 걱정된다”(이재은)고 첫 장편 데뷔작을 세상에 내놓는 소감을 이야기했다.

고3 시절 친구들이 성인이 되며 생긴 우정의 변화를 포착했다. [사진 엣나인필름]

고3 시절 친구들이 성인이 되며 생긴 우정의 변화를 포착했다. [사진 엣나인필름]

정희와 민영만큼이나 서로 비슷하고도 다른 두 감독은 2017년 겨울 한 영화워크숍 수업에서 처음 만났다. “어릴 때 서운함이 정말 많은 사람이었다”고 스스로 묘사하는 이 감독이 친구 간의 서운함에 대해 써둔 단편 시나리오를 임 감독에게 함께 작업하자고 손 내밀면서 모든 게 시작됐다.

“저희 둘 다 처음엔 말수가 없어 보인다는 공통점이 있으면서, 제가 감성에 치우친 사람인 반면 언니(임 감독)는 좀 더 이성적, 체계적이라는 차이점이 있었어요. 저한테 부족한 면이 있는 언니에게 좀 의지해서 가야겠다 싶은 마음에 공동 연출을 제안했죠.”

단편을 염두에 두고 시작된 작업은 두 사람의 세계를 오가며 점점 양이 불어났다. 하염없이 수정과 살붙이기를 거듭하던 중 장편을 만들기로 확정한 결정적 계기는 영화진흥위원회의 단편영화 제작지원 면접에서 들은 이야기였다. 임 감독은 “면접을 보러 갔는데 ‘단편치고 너무 길다. 혹시 더 넣고 싶었는데 못 넣은 이야기도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그런 점 때문에 점수를 짜게 주셨다고 했지만, 저희는 오히려 그때 처음 장편으로서의 가능성을 보고 기뻐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민영과 정희의 단 하루만 다뤘던 단편은 이들의 고등학생 시절까지 보여주는 장편으로 발전했다.

두 감독은 시나리오를 공동 작업한 과정에 대해 “노트북 한 대를 두고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썼다 지웠다 해가며 진행했다”며 “각자 역할을 맡아 대사를 수없이 읽어보고, 상황극도 해봤다”고 설명했다. “혼자였다면 맞게 가고 있는 건지 항상 불안했을 텐데 물어볼 상대가 있는 게 좋았어요. 서로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좀 더 최선의 결정을 하게 된 측면도 있고요.”(임지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지난한 작업을 거치며 막막한 순간은 없었을까 싶지만, 영화를 완성하게 해준 원동력을 묻자 “마이너스 통장”이라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이 감독은 “사실 그러면 안 됐는데, 당시엔 마이너스 통장을 뚫는 것도 그다지 큰 감내라는 생각이 안 들었다”며 “개봉은 생각지도 못했지만, 그냥 영화제 한 군데에서만이라도 걸리면 좋겠다, 한번 할 거면 확실하게 해야지 하는 패기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정말 다행히 (마이너스 통장은) 영화제 상금으로 메꿀 수 있었다”고 임 감독이 웃으며 덧붙였다.

영화는 그 내용과 대사의 현실감만큼이나 미술·연기 면에서도 사실적인 톤을 취했다. 임 감독은 “없는 살림이었지만, 유일하게 제작비를 아끼지 않은 부분이 기숙사나 원룸 등의 촬영 장소를 실제 생활감이 느껴지도록 꾸미는 미술 파트였다”며 “소소한 감정과 일상을 다루는 영화다 보니 그런 사소한 디테일을 살리는 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연기 측면에서도 친구 사이의 미묘한 어색함을 살리고자 원래 활달한 배우들의 표정과 억양을 “건조하게, 다이내믹하지 않게 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렇게 지극히 현실적으로 흘러가던 영화는 정희가 민영에게 남기는 편지 한장으로 예상치 못한 강한 여운을 준 뒤 막을 내린다. 이 감독은 이런 결말에 대해 “나는 친구에 대한 서운함이 항상 부끄럽고 유치한 감정이라고 생각해 숨기려 했다. 그런데 정희가 편지를 쓰고 떠나는 모습이 굉장히 용기 있다고 생각했다”며 “관객분들이 영화를 볼 땐 생각 없이 웃다가, 다 보고 나서는 각자의 민영이와 정희가 생각나고, ‘한번 연락해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 성공일 것 같다”고 말했다.

임 감독은 “이 영화는 어쨌든 마지막 장면을 위해 차곡차곡 쌓아가는 영화”라며 “마지막 부분을 통해 소소한 위로와 순수한 온기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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