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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상욱의 미래를 묻다

한국의 과학기술 동맹은 어디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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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미 인플레이션 감축법 발효의 의미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이해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지난주에 발효된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 얘기다. 물가 상승을 막으려면 돈을 거둬들이는 게 상식인데, 4370억 달러(약 584조원)의 재정 지출이 주요 내용이다. 에너지 안보와 기후변화에 3690억 달러, 건강보험료 부담 개선에 640억 달러, 서부지역 가뭄피해 복구에 40억 달러를 투입한다. 법인세 증세와 약가(藥價) 개혁, 탈세 방지 및 추징 강화, 자사주 매입 수수료 등으로 7370억 달러를 걷어 전체로는 재정적자를 3000억 달러 줄인다는 계획이다. 경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돈 나갈 데는 분명한데 들어온다는 돈은 희망사항이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백악관은 에너지 가격과 건강보험료를 억제함으로써 소비자 물가 상승을 막으니 인플레이션 감축이 맞는다고 한다. 알쏭달쏭하다.

한국,  미·중 틈에 낀 난처한 국가
‘안보 미국, 경제 중국’은 어불성설
미국 기술 중국에 전수하는 형국
현실화 된 우방국 위주 공급망 재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6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한 뒤 조 맨친 상원의원에게 펜을 건네고 있다. [A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6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한 뒤 조 맨친 상원의원에게 펜을 건네고 있다. [AP=연합뉴스]

내용을 들여다보면 미국의 속내가 ‘메이드 인 아메리카(Made in America)’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19일 백악관 발표문을 보면 청정에너지 분야에서 미국 내 제조업을 부흥시키고 일자리를 창출하며, 공급망을 국내 위주로 재편하겠다는 얘기가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이를 위해 ‘우려되는 외국’을 공급망으로부터 밀어내는 장치들을 만들었다. 트럼프 행정부가 대중 전략기술 무역규제와 몇몇 기업 및 기업인을 특정해 제재한 것과 비교하면, 보조금 성격의 전기차 세액공제처럼 시장 메커니즘에 작용하는 정책수단을 쓰는 것은 세련되어 보인다. 어쩌면 무역규제와 제재가 별 효과가 없었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문제는, 블랙리스트 방식의 핀포인트 제재와 달리 차등 보조금제는 엉뚱한 데서 유탄을 맞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아니, 이마저도 의도한 것으로 피탄(被彈) 범위가 넓다고 해야 할까. 내년부터 미국 소비자가 전기차 세액공제를 받으려면 차량이 미국 내에서 생산돼야 함은 물론, 전기차 배터리에 들어간 핵심 광물이 40% 이상 미국과 FTA를 맺은 국가에서 추출·제련되거나 북미 지역에서 재활용된 것이어야 한다. 2029년까지는 주요 부품까지 100% 북미산이어야 한다. 한편, 전기차 제조사와 배터리 생산업체들의 공급망 재편을 장려하기 위해 10%의 ‘첨단 제조업 생산 세금 공제’와, 배터리 1 킬로와트시(㎾h) 용량당 35달러의 ‘에너지 저장 및 생산 세금 공제’도 적용된다. 현재 연간 20만대인 세액공제 적용 대수 한도는 없어진다. 복잡한 이야기를 요약하면, 전기차 가치사슬의 시작인 리튬부터 중류부문인 배터리 제조, 최종 제품인 전기차, 그리고 구매자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산업진흥정책을 내놓으며 공급망 국내화를 조건으로 단 것이다. 전기차 외에도 태양광·풍력·탄소포집·청정수소 분야에서도 미국 내 공급망 구축을 위한 조세 혜택을 제공한다.

앞서 말한, 공급망에서 밀어내려는 ‘우려 국가’는 중국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 제재는 5G 데이터 통신과 반도체에 집중되었는데, 바이든 행정부는 미·중간 기술 냉전의 전선을 재생에너지와 전기차로 확장했다. 첨단·미래 기술 분야에서 속속 새 전선이 그어질 것이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 분야에서 ‘설명 가능한 인공지능’이나 ‘책임성 있는 인공지능’과 같이 서구 국가들이 주도하는 윤리 규범 준수를 중국에 요구하고, 미준수를 이유로 제재를 가할 수 있다. 비슷하게 데이터 산업에서 개인정보 보호 수준을 문제 삼을 수 있다. 동물실험과 임상시험 등에서 생명윤리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이미 미국을 필두로 서방 국가들은 효력과 안전성 검증을 신뢰할 수 없다며 중국산 코로나 백신을 무시한 바 있다. 자유민주주의 진영에서 발전시켜 온 가치와 규범이 무기로 쓰일 것이다. 미·중간 기술 갈등이 산업과 무역 경쟁을 넘어 이념적 갈등에 기반한 체재 경쟁인 것이다. 기술 냉전이다.

미국이 산업 공급망과 기술 협력망에서 중국을 몰아내도 중국에 타격이 없을 경우 기초과학 분야에서도 교류 제한 조치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이미 중국의 해외 과학기술 인재 유치 전략인 ‘천인계획(千人計劃)’ 방어에 나섰다. 대형 국제공동연구프로젝트에 미국과 중국이 협력하는 경우는 없다. 앞으로는 미·중 학자 개인 수준의 공동연구도 위축될 수 있다. 팬데믹으로 반 토막 난 미국 대학의 중국 유학생 수는 이전으로 회복되기 어려울 것이다. 공급망과 과학기술 네트워크에서 중국을 고립시키는 것은 중국의 경제성장과 국력 배양을 방해하는 것보다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유럽과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억제하는 효과가 크다. 미국의 전통적인 동맹과 우방국들이 중국으로 기우는 것을 막는 것이다.

한국은 미·중 사이에 낀 ‘난처한’ 국가들 중 가장 중요한 나라다. 경제 규모가 크고, 산업경제적으로 미·중 양국 모두와 얽힌 정도가 상당하다. 안보 측면에서는 미국의 가장 강력한 동맹국 중 하나면서 중국의 혈맹인 북한과 부대끼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이 신경 쓰는 반도체·배터리·전기차 산업을 모두 갖고 있다. 미국 반도체 산업 지원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한국은 미국에 붙으라는 것이다. 그간 한국이 애써 외면해 온 선택의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닥쳤고, 유탄을 맞은 피해는 실질적이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따라 현대기아차는 새로 투자한 미국 전기차 공장이 완공되기 전까지 수출에 타격을 입게 된다. 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는 미국 수출용 전기차 배터리에서 리튬·코발트·니켈과 주요 소재·부품의 공급처에서 중국을 배제해야 한다. 미국 주도의 반도체 동맹인 ‘칩4’ 참여도 망설일 수 없는 상황이다. 칩4는 단순한 친목 모임이 아니라 반도체 가치사슬에서 미국의 팹리스(설계), 일본의 소재, 대만과 한국의 파운드리(제조)를 엮는 공급망 동맹이기 때문이다. 칩4는 일본이 무모한 수출규제를 철회할 명분이 된다.

과학기술 차원에서 보면 소위 ‘안미경중(安美經中)’같은 얘기는 어불성설이다. 한국이 사용하는 산업기술이 미국산이기 때문이다. 2020년 기준 미국으로부터의 기술도입 규모는 약 59억 달러로 압도적으로 가장 많고, 중국으로부터의 기술도입은 약 6.4억 달러로 아홉 배 이상 차이가 난다. 한국이 산업화를 시작한 때부터 누적해보면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 기술무역 수지를 보면 2020년 대미 적자가 33.2억 달러, 대중 흑자가 23.7억 달러를 기록했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기술을 사다 쓰고 중국에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독자들 중에는 “아니, 우리나라가 산업기술 선진국인 줄 알았는데, 여태 기술을 사다 쓴다고?”라고 놀랄지 모르겠다. 한 나라가 모든 제품과 서비스를 다 생산해 자급하는 대신 무역을 통해 경제의 효율을 높이는 것처럼, 기술도 모두 자체 개발하는 대신 라이센싱을 통해 필요한 때 개발비용보다 싸게 구해 쓴다. 그래서 기술도입은 연구개발이 활발할수록 오히려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기술무역 통계는 한국의 기술 파트너가 미국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지나친 단순화를 무릅쓰자면, 한국은 미국 기술로 공산품을 생산해 중국에 팔아 부국 반열에 올랐다. 한국 산업이 미국 기술에 의존해 온 이상, 미·중 사이에서 한국에 선택권이 있을 수 없다. 한국이 자체 개발한 기술도 그 뿌리, 즉 원천기술이 미국 것이면 미국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편, 인공지능과 양자통신 등 중국이 한국보다 앞서가는 일부 분야에서 중국은 한국을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는다.

애플 아이폰이 많이 팔리면 삼성 갤럭시가 덜 팔려 손해일까. 아이폰에 들어가는 OLED 디스플레이·플래시메모리·배터리·카메라모듈은 한국산이다. 미국이 원천기술을 개발하고 혁신적인 제품과 서비스로 신산업을 열면 한국이 재빠르게 참여해 공정혁신을 주도하고 생산량을 늘려가며 양질의 하드웨어를 공급하는 협업 구조가 성공의 공식이 되었다. 산업뿐 아니라 한국의 과학기술 혁신 생태계가 미국의 혁신 생태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과거 고급 과학기술인력 양성을 상당 부분 미국에 맡긴 것이 사실이다. 1980~1990년대 국가 연구개발 사업을 시작할 때 기초연구 투자 없이 응용기술연구와 제품개발에 우선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기초연구 성과를 공유한 덕분이다. 네이처가 제공하는 학술지 논문 공저 인덱스에 따르면 작년 한국의 최대 협력상대국은 미국으로 비중으로는 45.8%에 이르고, 중국은 18.2%에 그쳤다.

미국 주도로 안보 동맹이 산업·경제 동맹으로 이어지는 안보-경제 커플링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프렌드 쇼어링(friend-shoring)’이라 불리는 우방국 위주의 공급망 재편은 신조어가 입에 붙기도 전에 현실이 되었다. 공급망 재편은 과학기술 지식 협력 네트워크의 변화로 번져가고 있다. 과학기술에도 동맹이라는 개념이 가능하다면, 또는 그런 개념이 요구된다면, 한국의 과학기술 동맹은 어디일까. 백 년 후라면 몰라도, 지금은 답이 명확하다.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