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축구」도입 서둘러야|차범근이 보는 한국 축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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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세계적인 축구 선수였던 차범근(38)씨가 10년간의 서독생활을 마치고 귀국한지 이번 달로 만1년을 맞았다. 프로구단들의 끈질긴 영입 유혹을 뿌리치고 어린이 축구교실운영에 몰두하면서 프로 리그를 포함한 각종 국내 대회와 월드컵 대회 등을 직접 참관한 차씨는 자신이 피부로 느낀 오늘의 한국 축구를 전문가의 안목으로 진단, 본사에 기고해왔다. 차씨의 눈을 통해 표류하고 있는 한국 축구의 진로를 모색해 본다. <편집자주>
우리 나라 경제가 기술자본의 축적 없이 몰아 붙이더니 이제 그 한계에 부닥친 모양이다.
물론 여러 가지 주변환경이 어려운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고급 기술의 축적이 없는데 기인한 것이다. 「상품가치가 높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고의 기술이 요구된다는 단순한 논리가 입증된 셈이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1983년 국내에 프로 리그가 생겨난 후 우리축구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다. 초창기라고 할 수 있던 시기에는 그 성장속도가 눈에 보일 만큼 빨라서 그 동안 어렵게만 느껴지던 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두 번씩이나 연거푸 따내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프로가 생김으로써 선수들 대우가 개선되고 그로 인해 많은 선수들은 좀더 오래 프로선수로서 생활하기를 원하게 되었다.
이렇게 양적으로 늘어난 우수 선수들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규칙적이고도 잦은 경기경험을 통해 경기를 풀어 가는 감각이 향상되었고 지금은 아시아에서 가장 경기를 매끄럽게 풀어 가는 팀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좀더 냉정하게 본다면 세계무대에서 우리 선수들은 4년 전 멕시코 대회 때보다 지난 로마 월드컵 때 기량이나 능력 면에서 별로 향상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도리어 퇴보하지 않았느냐고 묻기도 한다.
서독에서 귀국, 1년 동안 우리 축구를 지켜보면서 나는 우리 축구가 지금 그 성장을 멈춘 단계라고 생각한다.
상당히 조심스러운 얘기이기는 하지만 나는 우리 축구가 지금의 여건이나 기술로는 이제 그 한계에 왔다고 느껴진다.
물론 지금 얘기한 기술이란 단순한 경기력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기술·지도기술·경기기술·개인기술 등 축구 전반에 걸친 모든 기술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월드컵이 끝난 후 『우리가 16강에 오르지 못한 것은 결코 감독 한 사람만이 책임질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고 자주 얘기했었다. 나를 포함한 다른 어떤 감독이 대표팀을 이끌었다 하더라도 결과 면에서는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그것은 국내 축구계가 근본적으로 더 나은 축구를 하기 위한 다각적인 기술 축적이 충분히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 어느 때 보다도 축구협회의 역할이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지금 같은 때에 협회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서 각 부문에 걸쳐 좀더 구체적으로 기술향상을 꾀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이끌어야 한다. 어느 국민학교 지도자는 울분을 토해내듯 『우리에게만 어린아이들을 잘못 훈련시킨다고 하지만 우리는 한번도 국민학교 어린이는 어떻게 훈련을 시켜야 하는지 배워 본적도, 들어 본적도 없습니다. 강습이라고 해서 나가보면 그나마 모두 성인 축구를 위한 것뿐인데 어떻게, 무엇을 잘못 가르치는지 알아야 고칠 것 아닙니까』라고 볼멘소리를 한다.
바로 이런 얘기는 중·고등학교 지도자들에게서도 자주 듣는다. 솔직히 말해서 프로팀이나 대표단 감독으로부터 들은 적도 있다.
바로 이런 여건 속에서 대표선수들만 일년 내내 묶어놓고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시켜서 좋은 경기를 해보겠다고 한다면 모레 위에 빌딩을 세우라고 다그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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