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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죽이고 형수를 아내로 탐했다…유인촌 50년만의 첫 악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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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7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햄릿'. 6년전 연출가 이해랑 탄생 100주년 공연 '햄릿'에서 6번째 햄릿 역을 맡았던 배우 유인촌이 이번엔 비정한 숙부 클로디어스로 출연했다. 사진 신시컴퍼니

7월17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햄릿'. 6년전 연출가 이해랑 탄생 100주년 공연 '햄릿'에서 6번째 햄릿 역을 맡았던 배우 유인촌이 이번엔 비정한 숙부 클로디어스로 출연했다. 사진 신시컴퍼니

“‘햄릿’은 해석이 다양해서 배우한테 탐나는 작품이죠. 하나의 캐릭터로 끌고 가는 인물이 아니라 왕자이기도 하면서 시인, 철학자고 어떤 때 보면 무관이기도 하고요. 젊은 시절부터 황혼까지 삶의 많은 걸 터득하고 무덤가에서 명상하는 철학적 인간의 모습이죠.”

햄릿 역만 여섯 번 한 배우 유인촌(71)의 연극 ‘햄릿’ 예찬이다. 1981년 극단 현대극장의 ‘햄릿’을 시작으로 85년 호암아트홀 개관 공연, 89년 연출가 이해랑의 유작이 된 ‘햄릿’, 93년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개관공연, 99년 제작까지 겸한 유씨어터 개관공연 등 햄릿과 함께 걸어온 그다. 6년 전 연출가 이해랑(1916~1989)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해랑 연극상을 받은 원로 배우 9명이 뭉친 기념 공연 ‘햄릿’에선 “세계에서 가장 늙은 햄릿”(유인촌)이 됐다. 객석 점유율 100%를 달성한 당시를 끝으로 “더는 ‘햄릿’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그가 형의 왕위를 찬탈한 비정한 숙부 클로디어스가 되어 돌아왔다. 무대 인생 50년 만의 첫 악역 도전이라고 한다.

현대로 온 '햄릿' 유인촌 50년 만에 첫 악역 

지난달 13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햄릿’은 시대 배경을 현대로 옮겼다. 덴마크 왕가란 설정과 캐릭터는 420여 년 전 셰익스피어의 원전을 고스란히 살렸다. 2016년 기념 공연의 극본 배삼식, 연출 손진책에 더해 전무송(81)‧박정자(80)‧손숙(78)‧정동환(73)‧김성녀(72)‧윤석화(66)‧손봉숙(66) 등 주연급 선배 배우들이 조연‧앙상블로 다시 뭉쳤다. 햄릿 역의 강필석(44), 오필리어 역의 박지연(34) 등 주역은 후배들에게 물려줬다. 당시 병환으로 연습 중 하차한 권성덕(81)도 무덤파기 역할로 돌아왔다. “6년 전에 했던 분들 누구 한명이라도 빠졌으면 안 했어요. 그런데 다 하신다는 바람에….”(웃음)

연극 '햄릿'에서 악역 클로디어스로 돌아온 유인촌. 그를 비롯한 평균 나이 75세의 배우 9명이 주역은 후배 배우들에게 물려주고 조역, 앙상블로 뭉쳤다. 유인촌은 특히 최고령 배우 권성덕(81)에 대해 "선생님은 걷기도 힘든데 목소리가 쨍쨍했다. 연습 시작할 때 만해도 힘들어하셨는데 무대에 서니까 날이 갈수록 오히려 허리가 펴지더라”고 존경을 표했다. 사진 신시컴퍼니

연극 '햄릿'에서 악역 클로디어스로 돌아온 유인촌. 그를 비롯한 평균 나이 75세의 배우 9명이 주역은 후배 배우들에게 물려주고 조역, 앙상블로 뭉쳤다. 유인촌은 특히 최고령 배우 권성덕(81)에 대해 "선생님은 걷기도 힘든데 목소리가 쨍쨍했다. 연습 시작할 때 만해도 힘들어하셨는데 무대에 서니까 날이 갈수록 오히려 허리가 펴지더라”고 존경을 표했다. 사진 신시컴퍼니

지난 2일 국립극장 분장실에서 만난 유인촌은 “70~80년대 명동예술극장에서도 선배들이 조‧단역을 다했는데 그 연극의 맛이 대단했다. 이번에 선배들이 단역을 해주니 빈 구석이 없어지고 좋다”며 “햄릿만 할 때는 주변 인물들에 대해 생각을 잘 못 했는데 이번에 왕(클로디어스)을 하며 햄릿이라는 연극 자체를 다시 보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지난 5월 제작발표회에서 “후배들이 부담 갖지 않고 맘껏 상상력을 펼쳐주면 좋겠다”고 했던 그 자신도 이번 무대에서 더 젊어진 느낌이다. 첫 등장부터 악역의 카랑카랑한 독기를 뿜어냈다.

-햄릿이 어떻게 다시 보였나.  

“왕 입장에서 햄릿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젊은 애다. ‘저게 감히 얻다 대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노력했다. 왕이 너무 노쇠해버리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나도 머리색을 검게 염색했다.”

-강필석의 햄릿은 어떻던가.   

“현대적인 햄릿이다. 장단점은 있다. 요즘 표현방식은 관객한테 확 느낌이 오지만 약간 인물이 가벼워지기도 한다. 이번 햄릿이 왕, 엄마와 자유스럽게 얘기하는 걸 보면서 강필석이 즐기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독백도 자기 생각을 막 던지고 스스럼없이 화도 낸다. 내가 그동안 했던 햄릿이 많이 억눌렀다면 그런 부분이 굉장히 다르다.”

-클로디어스는 어떻게 해석했나.  

“동정받지 않는 악인으로 그리고 싶었다. 특히 2막의 기도하는 장면은 절대 참회가 아니라 하느님한테 대들 듯 자기 합리화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요즘은 다 뻔뻔한 세상이다. 잘못한 놈이 더 난리 친다. 나쁜 놈이 너무 많아서 더 나쁘게 하고 싶었다. 그 나쁜 걸 거울처럼 보게 하고 싶었다.”

실제로 1막에서 형수 거트루드(김성녀)를 아내로 맞은 클로디어스가 눈물기라곤 조금도 없는 말투로 형에게 바치는 추도사에서는 슬픔보다 욕망과 야심이 배어난다. 현대적 양복 차림의 그는 욕망의 불도저, 비정한 재개발사업가처럼도 보인다.
특히 2막 기도장면은 “우리에 갇힌 짐승 같은 목소리”로 연기했다. 1막에서 죄를 숨기던 클로디어스는 이 장면에서 “아, 나의 죄여. 온 천지에 악취가 진동하는구나”라면서도 “나는 인간이다. 나는 살아야겠다!”고 발악하며 본색을 드러낸다. “녹슨 강철의 심장이여! 삐걱이는 무릎이여!”라며 신의 위로를 요구하는 장면은 캐릭터의 철면피 같은 면모와 함께 “죽음 바라보기”(손진책 연출)라는 작품 주제를 자연스레 드러낸다.

이번 원로급 캐스팅이 빛나는 게 이런 지점이다. 햄릿의 고뇌에 짓눌려 서사적 장치로 밀려났던 인물들이 각자 삶의 무게를 짊어진 인간이란 점을 곱씹게 만든다. 89년 이해랑 연출이 개막 직전 세상을 떠나며 유고작이 된 ‘햄릿’에서 “적극적이고 행동하는 햄릿”(중앙일보 1989년 4월 17일자 기사)을 연기하고 99년 자신의 극장 유씨어터 개관공연 ‘햄릿1999’에선 세기말 한국의 정치 딜레마를 풀어냈던, ‘햄릿’ 전문 유인촌이 클로디어스로 ‘햄릿’ 연극의 마침표를 찍게 됐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고전의 교훈 "'리어왕' 보면 재벌 기업가 생각나" 

‘햄릿’과 함께한 40년간 인간 유인촌의 길도 예측불허였다. 장수 드라마 ‘전원일기’(1980~2002)의 용식이로 22년을 살았다. 이명박 정권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시절 구설수도 많았다. 이번 연극도 ‘팬데믹의 시간을 지나, 상실된 연극을 다시 깨우다!’라는 구호로 개막했지만, 사흘 만에 배우들이 잇따라 코로나19 확진되며 공연이 중단돼 지난달 26일에야 재개했다. 폐막은 오는 13일이다.

오는 13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햄릿'. 비정한 숙부 클로디어스 역을 맡은 유인촌은 2016년까지 햄릿 역할만 6번 하며 한국 '햄릿' 역할 전문 배우로 통한다. “해외 공연에선 한복을 입고 ‘햄릿’을 하기도 했다” 는 그에게 햄릿은 연극 ‘문제적 인간, 연산’(1995), 임권택 감독 영화 ‘연산일기’(1988) 등에서 잇따라 맡은 연산군과 나란히 대표 캐릭터로 남아있다. 사진 신시컴퍼니

오는 13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햄릿'. 비정한 숙부 클로디어스 역을 맡은 유인촌은 2016년까지 햄릿 역할만 6번 하며 한국 '햄릿' 역할 전문 배우로 통한다. “해외 공연에선 한복을 입고 ‘햄릿’을 하기도 했다” 는 그에게 햄릿은 연극 ‘문제적 인간, 연산’(1995), 임권택 감독 영화 ‘연산일기’(1988) 등에서 잇따라 맡은 연산군과 나란히 대표 캐릭터로 남아있다. 사진 신시컴퍼니

“젊을 때는 연기를 힘으로 하고 에너지로 했다면 나이 먹으며 차분하게 가라앉고 더 내면으로 들어간다”는 그는 다시 선배 배우들과 공연한다면 어떤 작품을 하겠냐고 묻자 영원불변의 고전들을 짚어냈다. “‘리어왕’을 보면 재벌 기업가가 생각나죠. 자기 왕국을 이뤘지만 마지막엔 휠체어에 의지해 자식들 싸움을 보게 되는 사람도 있잖아요. ‘파우스트’나 ‘돈키호테’ 모두 세상의 거울 같은 이야기에요. 톨스토이의 ‘홀스또메르’는 ‘햄릿’보다도 많이 출연한 작품이죠. 짐승의 눈으로 본 인간 얘기에요. 아무리 좋은 옷 입고 화려하게 살던 귀족도 죽으면 살과 뼈는 아무 쓸모가 없더라는 대목에서 끝나죠. 연극이 끝나도 관객들이 바로 일어서지 못할 만큼 고전의 여운이 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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