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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문 황태자, 역대 최장수 총리…한일 관계는 역대 최악 [아베 피격 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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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선거 유세 도중 전직 자위대원의 총격에 숨진 아베 신조(安倍晋三·68) 전 총리는 일본의 최장수 총리다. 제 90대와 96~98대 총리를 지내며 총 8년 9개월 재임했다. 2012년 2차 집권 이후 6번의 중의원 및 참의원 선거에서 대승하는 등 2020년 총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아베 1강’ 독주 체제를 구축했다. ‘잃어버린 20년’ 회복과 개헌을 통해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 복귀를 내세운 것이 주효했다. 하지만 그의 ‘아베노믹스’는 일본 경제에 부담을 줬고, 대외 강경 노선으로 인해 한국·중국 등 주변국 관계는 역대 최악이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지난 2019년 7월 아베 신조 당시 총리가 자민당 참의원 당선자 이름 옆에 장미꽃을 붙이고 있다. [로이터]

지난 2019년 7월 아베 신조 당시 총리가 자민당 참의원 당선자 이름 옆에 장미꽃을 붙이고 있다. [로이터]

아베 전 총리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 명문가 출신이다. 외할아버지는 1955년 자민당 창당을 주도하며 2차대전 직후 일본 정치를 좌우한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다. 친할아버지 아베 간도 중의원 출신이다. 외종조부인 기시 전 총리의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는 아베 이전 일본의 최장수 재임 총리다. 아버지 아베 신타로는 외무장관과 자민당 간사장을 지냈다. 공교롭게도 아베 신조는 부친 아베 신타로와 같은 만 67세의 나이에 세상을 마감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세이케이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고베제강에서 잠시 근무하던 아베 전 총리는 1982년 아버지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했다. 1991년 총리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던 아버지 아베 신타로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2년 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야마구치현에서 출마해 중의원에 당선됐다.

2002년 관방 부장관 신분으로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해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 북한을 방문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2006년 9월 자민당 대표로 선출되며 2차대전 이후 최연소(52세) 총리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취임 1년 만인 2007년 7월 참의원(상원)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임했다.

절치부심한 아베는 5년만인 2012년 9월 다시 자민당 총재에 올랐다. 1955년 자민당이 만들어진 후 총재에 두 번 당선된 경우는 처음이다. 같은 해 12월 자민당이 중의원 선거에서 승리하며 다시 총리 자리에 올랐다. 2007년 아베 전 총리가 사임한 뒤부터 2012년 2차 집권하기까지 일본의 총리는 1년에 한번 꼴로 바뀌었다. 아베 전 총리는 집권 기간 정치를 안정시키고 현실주의 노선을 지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총리 보좌 기관인 총리관저를 통해 인사권을 틀어쥐고 관료들에 대한 압도적인 장악력을 발휘하며 장기 집권을 이어갔다.

지난 2013년 8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20 도쿄올림픽 유치를 위한 연설을 하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013년 8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20 도쿄올림픽 유치를 위한 연설을 하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하지만 2017년 모리토모 학원에 국유지를 팔아넘기려 했다는 의혹, 2019년 11월 벚꽃을 보는 모임 관련 스캔들, 2020년 코로나19 대처 실패 등으로 지지율은 20%대까지 떨어졌다. 결국 2020년 8월 궤양성 대장염 재발을 이유로 사의를 표명했다. 자신이 유치한 2020년 도쿄올림픽 개최를 통해 ‘일본 부흥’을 선언하려 했으나 코로나19로 올림픽이 1년 연기되면서 직접 올림픽을 치르지 못했다.

아베 전 총리는 퇴임 후에도 집권 자민당 내 최고 파벌인 아베파(옛 호소다파)의 수장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는 자신의 후임인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와 기시다 후미오 현 총리를 당선시키는 데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아베 전 총리가 제시한 방위비 증액, 자위대의 반격능력 보유, 자위대의 존재를 명기한 개헌 등은 현 집권 자민당이 그대로 추진하고 있다.

8일 일본 도쿄 시내에서 시민들이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총격 소식을 담은 요미우리 신문 호외를 받아보고 있다. [AP=연합뉴스]

8일 일본 도쿄 시내에서 시민들이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총격 소식을 담은 요미우리 신문 호외를 받아보고 있다. [AP=연합뉴스]

아베노믹스는 아베 전 총리의 경제 트레이드 마크다. 20년 이상 지속한 일본의 장기불황을 끝내기 위해 재정확장·금융완화·구조개혁이란 ‘3가지 화살’을 내놨다. 국채매입 등으로 시중에 돈을 푸는 '무제한 양적 완화'와 '마이너스 금리' 등 파격적 정책을 추진했다. 재정 지출을 공격적으로 늘려 기업을 지원하고, 엔화의 가치를 낮춰 수출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전략도 썼다. 초기엔 실업률이 낮아지고 증시 등 경제에 활기가 돌면서 한때 76%의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돈 풀기 효과였을 뿐 일본 경제의 근본적 체질 개선은 이뤄지지 않았다는 평가도 받았다. 로이터 통신은 “아베노믹스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불황은 강고했다"며 "2020년 코로나19 발생 이후 일본 경제는 더 큰 위기에 빠졌다”고 전하기도 했다. 최근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상황에선 아베노믹스로 인한 극도의 저금리 정책이 일본 경제엔 부담이라는 지적도 있다.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강경 매파 노선을 걸었다. 그는 재임 중 미국과 긴밀하게 협력하면서도 ‘보통국가’를 추구하는 강경 우익 노선으로 이웃과는 불편했다. 2차 집권 이듬해인 2013년 12월26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강한 반발을 불렀다. 2015년 8월 14일엔 일본의 침략 책임을 언급하지 않은 전후 70주년 담화를 발표했다.

한국과의 관계는 역대 최악이었다.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와 한·일 외교장관 위안부 합의를 발표했으나 문재인 정부 들어 합의는 뒤집혔다. 아베 전 총리는 당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과 편지를 보내는 것은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며 반발했다. 한국 대법원이 일본 기업의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을 내리자 반발해 반도체 수출규제 조치로 보복해 한일 갈등이 더욱 격화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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