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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소련군에 쫓겨난 동독 귀족들 아름다운 귀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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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독일 통일 후 시간이 흐르면서 옛 동독 지역에 과거의 '귀족'들이 하나 둘 돌아오고 있다고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이 14일 보도했다. 이 지역 귀족의 상당수는 1945년 소련군이 진주하자 황급히 삶의 터전을 버리고 서쪽으로 탈출했다.

탈출 귀족과 그 후손들이 조상의 영지에 돌아오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단순히 전원생활을 위해서인 경우도 있고, 고향에서 돈 좀 벌어보겠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귀족 작위뿐만 아니라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도 함께 가지고 온다. 옛 서독 지역에 비해 낙후된 고향의 발전을 돕겠다는 것이다.

서독에서 화장품 회사 임원을 지낸 헬무트 폰 말찬(57)은 93년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메를렌부르크 포어폼메른주의 작은 마을인 울리히스후젠으로 이사했다. 남작 작위를 소유했던 그의 조상이 대대로 살던 곳이다. 그러나 폰 말찬이 돌아왔을 때 선조가 살던 성은 거의 폐허가 된 상태였다. 그는 무너져가는 성 옆에 이동주택을 세워놓고 살며 이곳을 방 30개짜리 호텔로 개조했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출신인 그는 이 사업에 400만 달러(약 37억원)를 쏟아부었다. 성의 창고를 음악당으로 개조하고 여름 음악회를 열어 관광객을 유치하기도 했다.

해군 지휘관 출신인 크라프트 폰 뎀 크네제벡(52)도 비슷한 경우다. 역시 남작 가문 출신인 그는 조상의 영지인 브란덴부르크주 카르베로 돌아가 땅을 사들였다. 서독에서 태어나 자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처음으로 동독 땅을 밟았지만 어려서부터 받은 집안 교육이 그를 이곳으로 향하게 했다. 모은 돈을 탈탈 털고 대출까지 받은 폰 뎀 크네제벡은 옛 영지의 절반인 650㏊의 땅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는 이후 거의 방치돼 왔던 이 지역 농지와 삼림을 다시 개간하기 시작했다. 낡디 낡은 18세기 건물을 수리해 도시인을 위한 전원 휴양시설로 만들기도 했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지고도 오랫동안 생활고에 허덕였던 카르베 주민들은 관광 수입 등으로 모처럼 허리를 펼 수 있게 됐다.

이처럼 고향 발전에 앞장서는 돌아온 귀족을 지역 주민들은 '고무 장화 신은 남작들'이라고 부른다. 이름뿐인 귀족 작위를 내세우지 않는 것은 물론, 고무 장화를 신고 마구간을 청소하는 등 더러운 일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의 역사적인 건축물을 복원하는 데 사재를 털기도 한다. 농장을 세우는 등 일자리 창출에도 앞장서고 있다.

폰 말찬은 이에 대해 "(조상의 영지에) 공산주의자들이 머문 시간은 고작 45년"이라며 "우리 가문은 800년 동안 이곳을 지켜왔다"고 말했다. 그는 "내 조상이 잠들어 있고 내 자식들이 살아갈 이 땅은 나의 과거.현재인 동시에 미래"라고 강조했다.

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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