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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금리 빅스텝 시작…한국, 인상압박 커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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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볼커식(式) ‘거인의 발걸음’은 없었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22년 만에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상하며 빅스텝을 밟았지만 볼커를 따르지는 않았다. 파월은 한동안 전 Fed 의장이자 전설적인 인플레이션 파이터인 ‘폴 볼커’를 자주 소환했다. 파월이 볼커의 길을 선택할까 봐 시장이 두려워했던 이유다. 하지만 긴축의 강도는 시장이 긴장했던 것보다는 약했다. 특히 파월이 ‘자이언트 스텝’(0.75%포인트 인상) 가능성에 명확하게 선을 그으며 볼커의 길은 일단 보류했다는 평가다.

Fed는 지난 3~4일(현지시간) 열린 5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연 0.75~1.0%로 0.5%포인트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한 번에 0.5%포인트 올리는 이른바 ‘빅스텝’을 단행한 것은 앨런 그린스펀 의장이 재임하던 2000년 5월 이후 22년 만이다.

여기에 더해 Fed는 다음 달부터 대차대조표(B/S)를 축소하는 양적긴축(QT)을 시작한다. 만기가 도래하는 국채와 주택저당증권(MBS)을 재투자하지 않는 대신 소멸시키는 방식으로 시장에 풀어 있는 돈을 거둬들인다. 국채 시장의 ‘큰손’이었던 Fed가 발을 빼며 유동성이 마르면 긴축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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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d의 계획에 따르면 다음 달부터 3개월간 국채와 MBS를 각각 300억 달러와 175억 달러씩 매달 총 475억 달러의 자산을 줄여 나간다. 3개월 뒤인 9월부터는 그 규모를 매달 각각 600억 달러, 350억 달러씩 총 950억 달러로 늘린다. 파월은 “QT를 계획대로 진행하면 1년간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하는 정도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Fed의 빅스텝에 한국은행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Fed의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한국과 미국의 금리 역전이 시간문제인 데다 금리 역전에 따른 자본 유출 우려도 커진다. 게다가 미국의 긴축에 따른 원화 약세 등으로 인해 추가 금리 인상에 나설 수밖에 없어서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취임 전 “미국의 금리 인상 속도가 빠를 것이기 때문에 격차가 줄거나 역전될 가능성은 당연히 있다”며 “자본 유출은 금리뿐 아니라 환율 변화에 대한 기대 심리, 경제 전체의 펀더멘털(기초체력) 등 여러 변수에 달려 있기 때문에 반드시 금방 유출이 일어난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다만 “원화 가치 절하가 물가에 주는 영향을 조금 더 우려한다”고 밝혔다.

한국, 주담대 금리 13년 만에 7%대 진입 가능성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미국 기준금리 인상→한국 기준금리 인상→국내 은행 금리 인상’으로 이어져 대출자의 부담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특히 금융업계에서는 지난해 말 4.9%대에서 현재 6% 중반까지 오른 혼합형(고정형) 주택담보대출 금리(상단 기준)가 조만간 7%를 넘어설 것으로 내다본다. 이렇게 되면 이 금리는 2009년 이후 13년 만에 7%대에 진입하게 된다.

파월은 긴축의 채찍을 휘두르면서도 시장에 ‘당근’도 제시했다. 자이언트 스텝 여부를 묻는 말에 “FOMC는 0.75%포인트 인상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지 않다”며 “추후 몇 차례 회의에서 0.5%포인트 추가 인상을 테이블에 올려야 한다는 게 FOMC의 대체적인 생각”이라고 말했다. ‘자이언트 스텝’ 대신 ‘점보 스텝’(0.5%포인트씩 두 번 이상 인상)을 밟겠다는 것이다. 파월의 발언대로면 오는 7월 미국의 기준금리는 1.75~2.0% 수준에 이른다. 지난 3월 FOMC에서 공개한 점도표(1.9%)상의 전망치보다는 빠르다. 골드만삭스는 오는 6·7월 FOMC가 각각 0.5%포인트씩 금리를 인상하며 내년 6월까지 기준금리가 3.0~3.25%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빨라진 긴축 속도에도 ‘자이언트 스텝’까지 각오했던 시장은 안도했다. 이날 미국 증시 주요 3대 지수가 모두 급등했다.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 지수는 3.19% 뛰었다. 다우존스 지수도 2.81% 상승했고, S&P500 지수도 2.99% 올랐다. 연 3%대를 넘었던 미 국채 10년 만기 금리는 연 2.93%로 내려왔다.

파월은 경기에 대한 자신감도 드러냈다. 경기 침체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는 “가계와 기업의 재정 상태가 양호하고 초과 저축이 존재하며, 노동시장은 매우 강력해 경기 침체에 근접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연착륙할 좋은 기회가 있다”고 밝혔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도 거들었다. 옐런은 이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개최한 콘퍼런스에서 “시장의 우려와 다르게 미국 경제가 연착륙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월의 자신감과 ‘볼커 노선 포기’에 대한 전문가와 시장의 평가는 엇갈린다. WSJ은 이날 사설에서 파월이 “볼커의 길을 접어뒀다”고 평가했다. 이어 “볼커의 교훈은 Fed가 인플레이션 타개를 결정했을 때 그걸 하는 게 낫다는 것”이라며 “기다리면 더 나빠진다”는 우려를 드러냈다.

월가의 경기 전망도 비관적이다. 지난 3일(현지시간) CNBC가 경제학자와 펀드매니저, 투자전략가 등 시장전문가 3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57%가 Fed가 물가를 잡는 동시에 경기 침체에 빠지지 않는 ‘연착륙’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경기 침체를 피할 수 있다고 본 응답자는 33%에 불과했다.

특히 Fed가 직면한 난제는 물가다. 길어지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와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중국의 봉쇄정책이 공급망 문제를 심화시켜 물가를 자극할 수 있어서다. 첫 번째 변수는 오는 11일(현지시간) 발표되는 미국의 4월 소비자물가지수(CPI)다. 박성우 DB금융투자 연구원은 “6~7월 자이언트 스텝이나 오는 9월 FOMC부터 베이비 스텝(0.25% 인상) 회귀 여부는 향후 물가 전개 방향에 달려 있다”며 “인플레이션이 3월 정점이 아닌 것으로 판명 나면 어느 시점에나 0.75%포인트 인상을 본격적으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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