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선2035

1호가 되지 말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박태인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박태인 정치팀 기자

박태인 정치팀 기자

“1호가 되지 말라”.

인정하긴 싫지만 한국에서 산다면 가슴에 새겨야 하는 말이다. 엔데믹(endemic)이 가까워져 오고 거리두기가 해제되니 ‘확진자 0호’라 불렸던 사람들은 억울할 것 같다. ‘처음’ 확진됐다는 사실 말고는 별반 달라진 게 없지만 전 국민에게 동선이 공개되며 신상털이를 당했다. 이제는 묻지도 않는 동선을 숨겼단 이유로 법정에 서는 이들은 자신의 죄를 납득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타이밍이 좋지 않았을 뿐이라 생각할까. 외부인과 치킨을 먹다 코로나19에 걸린 야구선수들은 2년째 경기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 삭감된 연봉도 수억 원. 그들을 옹호하고 싶진 않지만, 역시 ‘처음’에 가까웠다는 것이 처벌 강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호’가 되는 것은 예측 불가능한 영역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올해 1월 중대재해법이 도입된 뒤 공사 중지를 택하는 기업이 속출했다. 손해를 보더라도 본보기가 될 ‘1호 기업’은 피해야 한다는 고충 때문이었다. 결국 1호 위반 사업장으로 입건된 삼표산업은 수사와 동시에 세무조사를 받고 있다. 3명의 노동자를 사망케 한 기업에 대한 엄벌은 필요하다. 하지만 다른 기업들이 “1호는 피해갔다”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공사를 재개하는 건 비정상적이다.

코로나19 거리두기 해제 이후 첫 주말을 앞둔 22일 오전 김포공항 국내선 청사가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다. [연합뉴스]

코로나19 거리두기 해제 이후 첫 주말을 앞둔 22일 오전 김포공항 국내선 청사가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다. [연합뉴스]

이들을 탓하기 어렵단 말도 부정하긴 어렵다. 최후의 보루여야 할 수사기관과 법원도 ‘1호 피고인’에 대해선 자유롭지 않아서다. 문재인 정부에서 되살아난 직권남용죄는 수많은 ‘1호 사건’을 만들어냈다. 언론 보도와 더해져 형량은 춤을 췄다. 법조계에 손꼽히는 직권남용죄 전문 변호사는 “나도 판사였지만, 판사들은 본보기가 된 사람들에겐 깜짝 놀랄 정도로 가혹하다”고 했다. 대법원이 직권남용죄의 문턱을 높인 건 국정농단 특검 수사가 끝난 지 3년이나 지난 뒤였다.

언제까지 ‘1호’들만 이런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할까. 처음부터 끝을 바라보며 기준을 세워야 했지 않을까. 어떤 국가들은 이를 시스템이라 부른다. 여론과 상황에 맞춰 엿가락처럼 흔들렸던 잣대는 지속할 수 없다.

애초부터 감염병과 프라이버시 간의 명확한 기준을 세우고, 노동자의 생명을 존중하는 문화를 마련했어야 했다. 권력을 남용하는 견제장치는 누가 집권하든 작동하게 하여야 했지만 모두 외면해왔다. 처음부터 일관되고 공정한 기준을 세우고 적용하는 게 맞지 않을까. 매 순간 1호라는 본보기를 찾아 문제를 해결한 척 넘어가기보단 말이다.

“1호가 되지 말라”라는 이 경구와 같은 문장 속엔 “이 순간만 모면하면 된다”는 뜻이 숨겨져 있다. 그것이 한국 사회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그런 대응으론 재발을 막을 수 없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1호는 순서에 불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