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예수뎐] 갈릴리 호수 폭풍 가라앉힌 예수의 한마디…우리 삶의 폭풍은?

중앙일보

입력 2022.04.2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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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호의 예수뎐]  

갈릴래아(갈릴리) 호수는 부드럽다. 동틀 녘과 해 질 녘이 특히 그렇다. 불그스름한 노을에 호수가 파스텔 톤으로 물들면 물새들이 수면을 가른다. 그러면 멀리 나갔던 배들이 호수 위에 기다란 물살을 남기며 부두로 돌아온다. 평화롭기 짝이 없다. 그런 갈릴래아 호수도 구름이 끼고 돌풍이 불면 달라진다. 순식간에 파도가 넘실대는 시퍼런 바다로 변한다.

(44) 예수는 어떻게 폭풍을 잠재웠나

예수 당시에는 배가 작으니 파도가 치면 이리저리 기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풍랑이 몰아칠 때는 어땠을까. 어부들은 목숨을 걸기도 했을 것이다. 갈릴래아 호수의 둘레는 63㎞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호수의 이쪽과 저쪽을 오갈 때 종종 배를 탔다. 걸어서 가려면 호수를 빙 돌아가야 했다. 배를 타는 편이 훨씬 빨랐다.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에 있을 때 갑자기 폭풍이 몰아쳤다. 제자들은 위험하다고 난리였지만, 예수는 그 와중에도 잠을 자고 있었다. [중앙포토]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에 있을 때 갑자기 폭풍이 몰아쳤다. 제자들은 위험하다고 난리였지만, 예수는 그 와중에도 잠을 자고 있었다. [중앙포토]

그날도 예수는 제자들과 배를 탔다. 그런데 호수에 큰 풍랑이 일었다. 넘실대는 파도가 배를 덮쳤다. 거센 파도 속에서 배가 위태롭게 기우뚱거렸다. 마르코 복음(마가복음)에는 “물이 배에 거의 차게 되었다”(4장 37절)라고 적혀 있다.

그 와중에도 예수는 자고 있었다. 그날도 온종일 메시지를 전하고, 마음이 아픈 이들을 어루만지고, 몸이 아픈 이들을 돌보았다. 그런 일과를 마치고 배에 올라타자 예수는 곯아떨어졌다.

상황은 심각했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이렇게 말했다. “주님, 구해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오 복음서 8장 25절) 제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할 정도였다. 바다에 빠져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예수가 눈을 떴다. 예수는 오히려 호들갑 떠는 제자들을 나무랐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자리에서 일어선 예수는 바람과 호수를 향해 꾸짖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성경에는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마태오 복음서 8장 26절)라고 기록되어 있다. 배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오 복음서 8장 27절)

갈릴래아 호수에 노을이 지고 있다. 요즘도 호수에는 간혹 돌풍이 몰아친다. [중앙포토]

갈릴래아 호수에 노을이 지고 있다. 요즘도 호수에는 간혹 돌풍이 몰아친다. [중앙포토]

갈릴래아 호수의 예전 모습. 예수 당시에도 이런 풍경과 비숫하지 않았을까. [중앙포토]

갈릴래아 호수의 예전 모습. 예수 당시에도 이런 풍경과 비숫하지 않았을까. [중앙포토]

나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갔다. 호수는 잠잠했다. “갈릴래아 호수의 파도가 높아질 때도 있느냐?”라고 물었더니 숙소의 유대인 직원은 “돌풍이 불면 갈릴래아 호가 돌변한다. 그때는 배도 출항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저 어디쯤이었을까. 몰아치는 바람과 울어대는 호수를 향해 예수가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코 복음서 4장 39절) 하고 꾸짖은 곳이 말이다.

갈릴래아 호숫가에는 피크닉 공간이 있었다. 풀밭에 파라솔도 설치되어 있었다. 그 아래 앉았다. 바로 앞에 갈릴래아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궁금했다. 배가 뒤집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깨웠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코 복음서 4장 38절) 그렇게 물었다. 배가 침몰할 지경이었다. 누구라도 그렇게 묻지 않았을까.

그런데 예수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코 복음서 4장 40절) 하고 나무랐다. 예수는 왜 그랬을까?

비단 갈릴래아 호수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삶에도 바람이 분다. 수시로 돌풍이 몰아친다. 그때마다 파도가 친다. 나의 일상, 나의 생활이 파도에 뒤덮인다. 우리는 예수를 깨운다. 어깨를 이리저리 흔들며 소리친다.

“제가 죽게 생겼습니다. 걱정되지도 않습니까?”

그럴 때도 예수는 눈을 뜨며 말한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호수에 몰아치는 폭풍을 향해 예수가 잠잠해지라고 하자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중앙포토]

호수에 몰아치는 폭풍을 향해 예수가 잠잠해지라고 하자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중앙포토]

나는 호숫가를 거닐다 눈을 감았다. 그렇다. 우리는 파도다. 이리 철썩 저리 철썩,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씩 출렁이는 파도다. 아침 출근길에 옆 차가 끼어들 때도 출렁이고, 차가 막혀서 결국 지각할 때도 출렁인다. 직장 상사에게 불려가 한 소리 들을 때도 출렁이고, 집에 돌아가 배우자와 말다툼을 할 때도 출렁인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게 파도의 일생이라고. 어쩔 수 없다고. 세상에 출렁이지 않는 파도가 어디 있느냐고 말한다.

호숫가의 풀밭에 앉았다. 요한복음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복음서 1장 5절)

〈45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짧은 생각
우리는 생각합니다.
어둠은 어둠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빛은 어둠의 바깥,
울타리 너머 저 어디쯤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빛을 찾습니다.
미래의 어느 시점,
꿈 속에나 나올 법한 땅에서
빛을 만날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가 찾는 빛은 늘
‘상상 속의 빛’입니다.

지금은 없고,
미래에만 기대하는
그런 빛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달리 말합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요한 복음서 1장 5절)

그 빛이 먼 미래에 있다고,
꿈결 속 약속된 땅에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 나의 발목이 푹푹 빠져서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이 진흙탕 속에,
그 빛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어둠 속에
그 빛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투덜대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아무리 봐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
   만약 빛이 있다면
   내 눈에 보여야 하지 않나.
   도무지 보이질 않는데,
   어디에 빛이 있다는 말인가.
   이 말이 절망하는 사람을
   오히려 더 절망하게 만든다.”

이렇게 반박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는 달리 봅니다.
먼 곳의 빛,
미래의 빛,
내 울타리 너머에만 존재하는 빛은
나의 빛이 아닙니다.

진정한 빛이라면
내가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이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먼 곳의 빛’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빛이 됩니다.
상상 속의 빛이 아니라
현실 속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요한복음은
빛 속에서 빛을 찾지 않고
어둠 속에서 빛을 찾으라고 했을까요.

우리의 눈을 열기 위해서입니다.
빛 속에서 빛을 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누구의 눈에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보는 일은
다릅니다.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눈에 낀 어둠의 커튼을
젖혀버린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거듭
강조합니다.

빛이 어둠 속에 있다고,
다만 어둠이 그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그러니 어둠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둠 속에 있는 빛을 보지 못하는
나의 눈이 문제일 뿐입니다.

어둠 속에는 늘 빛이 있습니다.
한순간도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다만,
나의 눈이 어둠만 보고
빛은 보지 않고 있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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