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기도해도 안 통하잖아요" 이런 불평, 예수의 답은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입력 2022.04.1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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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호의 예수뎐]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7장 7~8절)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내가 집착을 내려놓고 기도를 하는지, 아니면 집착을 안고서 기도를 하는지 어떻게 아나? 그걸 누가 아나?” 답은 간단하다. 자기 자신이 안다. 움켜쥐고 기도하는지, 내려놓고 기도하는지 자신이 안다. 다른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고 본능적으로 자신이 안다. 자신의 내면을 보기만 하면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에 있는 성묘교회 안이다.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의 주검을 눕혔다고 전해지는 돌 위에 순례객들이 손을 댄 채 기도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에 있는 성묘교회 안이다.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의 주검을 눕혔다고 전해지는 돌 위에 순례객들이 손을 댄 채 기도하고 있다 [중앙포토]

(43)나의 기도에는 왜 자기 십자가가 없을까

그렇다면 기도는 단순히 욕망의 투영일까. 예수의 기도는 달랐다. 기도가 십자가였다. 스스로 짊어지는 ‘자기 십자가’였다. 겟세마니에서 예수는 기도를 통해 ‘나의 뜻’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런 방식으로 청했고, 그런 방식으로 찾았고, 그런 방식으로 문을 두드렸다. 그래서 머물지 않았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예수의 가르침 앞에는 거대한 괄호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 괄호 속에 ‘십자가’를 넣어본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 채)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 채)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 채)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성서 속 인물들도 그랬다. 유대인들은 신에게 제물을 바칠 때 흠 없이 처음으로 태어난 새끼를 바쳤다. 농경 사회에서 소는 ‘재산목록 1호’였다. 그런 소에서 태어난 첫 송아지는 얼마나 귀한 재산이었을까. 유대인들은 바로 그것을 바쳤다. 자신에게 가장 귀한 것, 자신이 가장 집착하는 것. 그것을 태우면서 집착도 태우지 않았을까.

아브라함도 그랬다. 아브라함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조상이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세 종교. 그들 모두의 조상이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다. 부인 사라의 요청으로 하녀하갈에게서 먼저 아들을 봤다. 그가 이스마엘이다. 아브라함이 백 살쯤 됐을 때에야 사라에게서 아들이 태어났다. 그 아이가 이사악(이삭)이다.

아브라함은 말년에 얻은 자식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산으로 데리고 갔다. 칼을 내려치려는 순간 천사가 나타나 말리고 있다. [중앙포토]

아브라함은 말년에 얻은 자식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산으로 데리고 갔다. 칼을 내려치려는 순간 천사가 나타나 말리고 있다. [중앙포토]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했다. 처음 태어난 송아지도 아니고 처음 태어난 어린 염소도 아닌, 처음 태어난 자식을 바치라고 했다. 그가 가장 집착하는 대상. 하느님은 그걸 내려놓으라고 했다.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땠을까.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당시 중동 지역 이민족들이 믿던 종교에서는 실제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유대교는 달랐다. 사람 대신 가축에게서 처음 태어난 새끼를 바쳤다. 그것으로 ‘사람 제물’을 대신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바치라고 했다. 그리스도교 성경에는 그 자식이 ‘이사악’으로 기록돼 있다. 이슬람교에서는 이사악이 아니라 하갈의 자식인 이스마엘이라고 본다. 이사악보다 나이가 많은 이스마엘을 첫 자식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사악이 유대 민족의 조상이듯 이스마엘은 이슬람 민족의 조상이다.

아브라함은 결국 자식을 데리고 산으로 갔다.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장소였다. 아브라함은 얼마나 망설였을까. 몇 번이나 주저했을까. 그러다 결국 칼을 빼들고 내리치려는 순간 천사가 나타났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내려다 본 올리브 산 근처의 풍경이다. [중앙포토]

예루살렘 성전에서 내려다 본 올리브 산 근처의 풍경이다. [중앙포토]

우리도 그렇다. 집착을 내려놓을 때 천사를 만난다. 신의 속성을 만난다. 왜 그럴까. 집착이 떨어질 때 기도가 항구를 떠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의 십자가’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렇다. 나의 기도 속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수시로 기도를 한다. 크고 작은 삶의 파도 앞에서 기도를 한다. 파도를 치워달라고, 파도를 재워달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예수가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건네려 하는 것은 파도가 아니다. 그 모든 파도를 품고 있는 바다다. 루카(누가)복음에서 예수는 분명하게 말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복음 11장 13절)

예수는 ‘성령’에 방점을 찍었다. 영어로는 ‘Holy spirit’, 그리스어로는 ‘pneuma(spirit) hagion(holy)’이다. 기도하는 우리에게 신이 건네는 건 다름 아닌 ‘성령’이다. 크고 작은 파도를 다 녹여버리는 ‘신의 속성’이다.

그래도 우리는 투덜댄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통하지 않아.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는 일화를 하나 들며설명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전해지는 장소에서 순례객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지금은 그곳에 교회가 세워져 있다. [중앙포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전해지는 장소에서 순례객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지금은 그곳에 교회가 세워져 있다. [중앙포토]

한밤중에 벗을 찾아간 사람이 있었다. 그가 빵 세 개를 꾸어달라고 했다. 손님이 찾아왔는데 내어놓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다가 일어난 친구는 귀찮아했다.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고,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빵을 내어줄 수 없다고 했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복음 11장 8절)

우리는 기도한다. 집착을 안고 기도한다. 잉크 속에서 기도한다. 그러다 투덜댄다. 기도가 통하지 않는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검은 잉크 속에서 자꾸만 맴돌 뿐이라고. 그렇게 불평한다.

예수는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가 하늘과 연결돼 있다고 했다. 노을이 지는 갈릴리 호수의 풍경이다. [중앙포토]

예수는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가 하늘과 연결돼 있다고 했다. 노을이 지는 갈릴리 호수의 풍경이다. [중앙포토]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걱정하지 말라고. 그 잉크의 바닥에 도화지가 있다고. 지금 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포기하지 말라고. 머무는 바 없이 기도하라고. 끊임없이 두드리라고 예수는 말한다. “줄곧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왜 그럴까. 예수는 왜 포기하지 말라고 했을까. 왜 줄기차게 요구하라고 했을까. 왜 결국 문이 열릴 거라고 했을까.

이유가 있다.
우리가 이미 도화지 안에 있으면서, 도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44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짧은 생각
4월 17일은 부활절입니다.

2000년 전에 있었던
예수의 부활을 기리는 날입니다.

최근 베이직교회의 조정민 목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작년에 코로나에 감염돼
생사의 문턱을 넘나들었습니다.
지금은 폐가 60% 이상 회복된
상태라고 했습니다.
여전히 요양을 요하는 상태이지만
조 목사는 자신이 세상에 남아 있는 이유를
여전히 묵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물었습니다.
그게 2000년 전 이스라엘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념인지,
아니면
지금 이곳에서도 여전히 벌어지는
현재진행형의 사건인지 말입니다.

조 목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부활은 창조주의 무한한 생명에
 플러그를 다시 끼우는 일이다.”

창세기를 보면 신이 인간을 지을 때
‘신의 속성’ ‘하느님 나라의 속성’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때는 신과 인간이
서로 연결돼 있었습니다.
따로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인간은 신과 분리가 됐습니다.
조 목사는 그때 플러그가 빠졌다고 했습니다.
창조주의 무한한 생명으로부터
분리가 됐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다시 돌아가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빠졌던 플러그를 다시 끼우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플러그가 빠져버린 삶은
늘 고통스럽습니다.
선과 악을 나누고 따지는
분별과 결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싸움의 연속일 수 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는 본질적 평화가 없습니다.

반면 플러그를 다시 끼우면 어떻게 될까요.
창조주의 무한한 생명,
다시 말해 신의 속성과 연결됩니다.

조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자꾸 돈이나 권력이나
   건강을 달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부활의 생명이다.”

전자제품은 플러그를 다시 끼우면
전기가 통합니다.
나와 신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플러그를 끼우면
창조주의 무한한 생명이
내 안으로 흐르게 됩니다.

조 목사는 그것이
부활과 통하고,
구원과 통하고,
영원과 통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믿음’의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요?

교회에 다니고,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면
나는 예수를 믿고 있는 걸까요.

조 목사는 “믿음은 플러그다”라고 했습니다.

창조주의 무한한 생명에,
신의 속성에 다시 플러그를 끼우는 일.
그게 바로 믿는 거라고 했습니다.

끊임없이 생겨나고 부딪히고 소멸하는
파도로만 살다가,
플러그를 끼우면 달라집니다.
파도의 바탕인 바다를 다시 찾게 됩니다.
바다와 하나로 통하게 됩니다.

본래 내가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만나야 할
진짜 부활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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